30여 명의 여성 단원으로 구성된 고적대 응원단인 엔젤스.
여러모로 실업 야구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자이언츠.
야구 응원 문화가 이때 시작된 것입니다.
부산에서부터 시작된, 야구 응원 문화.
미국 같은 경우는 관중들이 다 같이 응원하는 문화는 없는 거 같고,
야구에 재미를 더해주는 한국의 특별한 응원 문화.
각양각색 야구장을 즐기는 사람들.
사실 견제 응원도 마!가 원조.
응원을 받는순간만큼은 아이돌이 된 기분이 든다는데,
1975년 창단된 자이언츠 실업 야구팀.
이듬해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업 야구 리그에 참가합니다.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을 선발하고 재일동포 선수 및 지도자까지 영입하게 됩니다.
당시 자이언츠 실업 팀 월급은 국내 최고의 수준입니다.
왜냐하면 자이언츠 운영 비용이 다른 실업 팀의5~6배에 달했던..
실업 야구의 평균 관중 수는 고작 1000명에 불과.
그런데 자이언츠의 창단 이후, 평균 관중 수는 5000명까지 증가합니다.
1977년 5월 24일 제 1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공주고 vs 부산고 결승전
정규 시즌이 도입된 실업 야구. 호아금기를 맞이한 고교 야구.
대중의 스포츠로 거듭나기 시작하는 야구.
자이언츠가 실업 리그에 참여하고 약 6년 후인 1982년.
한국 야구의 역사를 바꾼 2번째 결정적 장면.
88 서울 대회를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직업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1982년 3월 27일 서울 운동장에서 6개 구단으로 출범한 프로야구.
마침내 출범한 프로야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최태성이 프로야구 팬으로 입문한 계기가 1982년 3월 27일 열린,
오늘날 프로야구 1000만 관중 신화의 시작점.
개막 첫 경기로 열린 청룡과 라이온즈의 대결.
7대7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
투 아웃 만루에서 터진, 청룡 이종도의 끝내기 홈런.
9회말 2아웃
한 점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기적 같은역전 끝내기 홈런!!
스포츠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 성난 민심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
당시 이미 저변이 확대되어 있었기에 빠르게 프로화될 수 있었던 야구.
그렇다면 프로 야구는 첫 시즌부터 순항할 수 있었을까?
출범 첫해 무려 143만 명의 관중을 동원.
프로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구름처럼 모여든 관중들.
프로야구 출범 첫해부터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각 지역의 고교 출신 선수들을 선발했습니다.
팬들이 이미 고교 야구에 익숙했던 덕에 자연스레 정착될 수 있었던 지역인 연고제.
프로 야구팀은 곧 그 지역의 정체성이었다.
개막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프로 야구.
프로야구 원년 최고 인기 선수는??
불멸의 22승.
박철순.
24승 7세이브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요?
선발 투수로서 24승도 대단한 기록.
그것도 모자라 마무리 투수로 7세이브까지.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볼 법한 기록이라고.
뚫을 수 없는 방패에 맞서는 박철순의 공을 가볍게 쳐낸 타자가 있습니다.!
한국 프로 야구 처음이자 마지막 4할 타자.
백인천.
이대호가 2010년 타격 7관왕을 할 때 타율이 .364였다고.
4할ㅇ른 만화 같은 거라고.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4할 타자가 아직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미국의 마지막 4할 타자는 테드 윌리엄스라는 선수인데,
무려 83년 전인 1941년에 세운 기록이에요.
미국에서도 그렇게 귀한 기록이라니...
82년 당시 프로 야구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 겸 선수로 활동!
1962년 뛰어난 재능 덕에 일본 프로 야구로 스카우트 된 백인천.
심지어 일본에서 타격왕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국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국내로 복귀.
백인천 선수가 안타를치고 나가 베이스를 밟고, 타자에게 사인을 내던 모습은 굉장히 색다른 재밌거리였는데,
프로야구의 또 다른 인기 요인은?
비결은 바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하는 것입니다.
82년 당시 6개 구단 어린이 회원 수만 30만 명에 달할 정도!
유니폼이나 학용품 등을 선물로 받을수 있었는데, 각종 구단 용품을 갖춰 입으면 나도 프로야구 선수!
그리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바로 그 해에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경기가 펼쳐집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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