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티비보기

군산에서 1930년대를 만나다.

by 로토루아8 2017. 1. 5.
반응형

군산에서 만나는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곳곳이 남아있는 이국적인 정취를 볼 수 있습니다.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옛은행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습니다. 군산하면 역전의 선수로도 떠오르는 군산상고도 유명합니다. 박물관갓을때 야구와 군산상고에대한 사진과 전시품이 있습니다.  군산에는 80여채의 일본식 가옥이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군산에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해방 후에는 일본인들은 돌아가고 비어있거나 한국 사람이 살고있는 집입니다. 현재 대부분 철거되어 없어진 일본의 잔재들이지만 그러나 군산엔 여전히 일본식 가옥이 남겨져 있습니다. 추천하고픈 일본식 가옥은 신흥동에 있는 히로쓰 가옥으로 일본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정원도 일본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곳은 영화 타짜,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붉은색 담벼락이 아니었는데, 영화 타짜를 촬영하면서 붉은색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거부인 히로쓰 요시사부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사람이름을 따서 부른다. 포목점과 쌀장사로 떼돈을 벌은 히로쓰는 기와와 목재를 일본에서 공수하여 지은 사치의 그치를 보여줍니다. 세 채로 연결되어 있고 12개의 방이 있고 인력거가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을 정도로 크고 지금은 내부수리 중으로 내부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히로쓰 가옥에서 3분거리에 있는 사가와 가옥이 있는데, 원래는 공개를 안한다고합니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일본식 정원이고 내부 또한 일본 전통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관리를 잘한 덕에 내부에 들어가면  감탄이 절로 나는 100년 전 그대로의 일본식 가옥의 모습으로 바닥은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데 암살을 대비하여 일부러 소리나게 바닥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코노마라고 방바닥을 한층 높게 만들어 인형이나 꽂꽂이로 장식하고, 붓글씨등을 걸어 놓는곳이다. 집주인의 부와 취향을 보여주는 곳이다. 요코마도라고 방과 방 사이에 통풍과 채광을 위한 간이 창이 있다. 란마라는 것은 방을 가로지르고 있는 보 위에 양각과 음각, 투각을 사용하여 만든 나무 조각이다. 사가와는 집주인의 이름은 아니고 금고의 이름입니다. 내부에는 금고가 있는데 금고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집주인은 금고기술자의 출장비용은 100만원이라 아직도 못열고 있다고 합니다. 집 안쪽엔 거대한 철문이 하나 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전당포로 쓰였을 때 사용했던 금고입니다. 계단 밑 벽장에도 금고로 되어있고, 영화에서 보던 방공호도 있고, 지금은 닫혀있고 흔적만 있는것입니다. 군산에 있는 대부분의 일본식 가옥엔 금고가 존재한다고 해요. 많은 일본인들이 부를 축적한 우리 역사의 아픈 역사입니다. 당시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도시로 일본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1930년대 군산 인구의 약 30%가 일본인이었습니다. 군산에 많이 살았던 이유는 호남쌀이 군산항을 통해 한양으로 이동하는데 그 당시 물류의 중심이 군산항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군산 이주를 장려할 정도이었고, 전쟁 중이던 일본에겐 군인에게 지급할 식량 확보가 필요하기때문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중요 이유중 하나가 식량 자원이었기 때문인데, 나폴레옹 역시 보급품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패배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납니다. 1918년에 일어났는데, 제1차 세계대전 승국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 경제가 하락하고 생필뭄과 쌀값이 푹등하여 쌀이 필요했던것이고 비료와 농자재 값을 소작인에게 부과하고 소작료는 총 소득액의 50~80% 로 가지고 갔다. 일본인이 그렇게 받으니까 한국인 지주들도 덩달아 그렇게 받았습니다. 일본이 가져간 쌀의 양은 총 생산량의 53%입니다. 국내에서도 쌀폭동이 일어나게된다. 군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본인 대지주인 구마모토 리헤이는 국내 여행중에 군산에 정착했는데, 일본에서 종잣돈으로 쌀을 구입해서 팔면서 점점 불려서 최대 3300만제곱미터의 땅을 소유했다고 합니다. 여의도의 10배크기 입니다. 또 한명의 대지주인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사람은 재산이 너무 많으니까 광복 후 귀화신청을 했지만 신변의 위협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군산 발산초등학교 뒤편에 가면 창고 건물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곳은 시마타니 야소야가 소유했던 금고 건물로 웬만한 아파트보다 큰 금고내부로 지금은 그냥 비어있습니다. 6.25전쟁 당시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합니다. 금고에 들어가지 못한 거대한 석상, 석양, 석등 이런 것을이 정원에 있는데, 국보급 문화재 20여개와 보물 3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은 보물 제 276호로 고려시대의 화강암 석탑으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있는 봉림사지에서 옮겨진 것입니다. 금고 안에는 고려, 신라시대 도자기들이 꽉 차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확히 확인은 안되고 보물인 줄 모르고 나뒀다가 도굴꾼들이 훔쳐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석조물은 이동시에 훼손될 수 있기때문에 시마타니 야소야가 옮기다가 석탑이  5층에서 4층으로 되어있고 현재 군산시 문화재과에서 공공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것과 일본 문화가 섞여잇는 군산은 군사정부시절을 거치면서 지역발전이 정체되어 개발의 기회를 놓쳐서 지금까지 유지되어있지않나 싶습니다. 정부에서 소유했던 일본식 가옥과 건물들은 1995년쯤에 조선총독부철거 당시 같이 철거했지만 개인소유의 가옥은 철거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거 같습니다. 또 한 곳 군산의 일제 수탈의 아픈 흔적인  근대건축관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입니다. 저 문이 나이트클럽으로 이용시 없어졌다가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중입니다. 근대 건축물과 일제 강점기 화폐와 역사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예전에 군산에 갔다온 적이있는데 그때 공부를 하고 갔더라면 더 의미있게보고 느끼고 왔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군산 근대거리에는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색 벽돌로 지어진 옛 군산 세관건물이 있고 대표 건축물은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일제강점기의 은행 건축 양식으로 일본제 18은행었고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인천에도 일제강점기건물들이 남아있다고합니다. 군산 근대화거리의 위치는 군산시 장미동에 1930년대의 밀정, 암살세트장 같은 느낌으로 실제로1910년에서 1930년에 지어진 건물들입니다. 뾰족뾰족한 것은 고딕양식, 둥근 창문은 로마네스크양식, 지붕은 일본식으로 되어있다. 군산의 근대화 거리로 1930년대 옛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일본 제 18은행 군산지점등 근대 시기의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유럽풍의 건물이 많은 이유는 당시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탈아입구라하여 심지어 자신이 유럽의 일부라고 생각했다고한다. 그리고 이런 건축물로 힘을 과시한 일본의 지배전략이기도 하다. 군산세관은 군자금을 위한 다양한 세금을 만든 일본은 그 중에서 리어카세, 3월50전으로 월급보다 높았던 세금입니다. 그리고 배우세는 배우들은 세우를 더 내야한다고 합니다. 다음은 개세로 개를 키우면 지방세를 더 내야했다.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사용되었던 지폐가 군산세관안에 있는데 일본에서 관리한 조선은행 화폐가 있는데 화폐안에는 일본신의 그림이 있다. 전쟁자금이 많이 필요하므로 조선은행 화폐로 전쟁을 치뤘기때문에 자주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중요 전쟁 시마다 돈을 새로 조선은행에서 발행했던 일본은 자국의 경제보호를 위해서 조선화폐를 발행해서 식민지 지배를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내부엔 옛 군산의 사진이 전시되어있다. 당시 조선은행의 주 고객은 일본인과 일본과 연줄이 닿아 있던 조선인으로 보통 일본인들이 조선의 땅을 살수 있도록 싸게 대출을 해줬다고합니다. 싼 값에 대출을 받은돈으로 농민들에게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나중엔 땅을 빼았았다고 합니다. 모함과 사기, 살인 등 부조리로 얽힌 1930년대의 식민지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은 채만식의 장편소설인 탁류의 배경이 된 곳이 군산입니다. 소설속엔 미주장이란 곳이나오는데 미두취인소는 쌀과 콩의 선물시장으로 투기 열풍을 일으킨 곳이다. 결국 돈을 번 것은 일본인 지주입니다. 패망 이후의 일본인 재산은 자전거 바퀴에 유가증권등 재산을 넣어 가져가다 잡히기도 하고 양 손에 가방하나씩만 들고 가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놓고간 기업이 2700여곳으로 명성황후의 친척이 맥주기업을 인수해 지금도 이름이 있는곳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근대 유산 여행은 아픈 여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적하고 고즈넉하고 맛있는 집도 잇습니다. 그 중 유명한 이성당빵집입니다. 줄서서 먹는 곳입니다. 실제 군산사람보다는 방문객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유명한 빵은 단팥빵과 크림빵입니다. 일제때 이즈모야 빵집이 지금의 우리나라말로 이성당이 되면서 이름만 남은 곳입니다. 포루투갈어로 팡에서 유래된게 일본을 거처 빵이 된 것인데 손탁이라는 사람이 러시아에서 가져온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빵입니다. 우리가 먹는 처음 먹는 빵은 군산에서 제빵되었던 것입니다. 밀가루와 버터등의 재료가 원활하게 보급되기때문에 빵이 활발하게 생성되었던 것인데 예전엔 비싸서 고급레스토랑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당시 비법을 안알려주려고 한국사람은 주방에 금지였다고 합니다. 1940년대 이후에나 일손이 부족해서 주방에나 들어갈 수 있엇는데 그때서야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합니다.  일본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네거티브 문화재라고 부릅니다. 가기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은 두 발로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출처: tvn 동네의 사생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