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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한국사- 선조가 이순신에게 분노한 까닭은?

by 로토루아8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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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싸우도 모진 고문을 견디고 28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이순신, 인간 이순신으로서는 가장 괴로웠을 1597년이라고 해요. 1597년 첫 일기는 감옥에서 풀려난 4월 1일 쓰게 됩니다. 

 

 

 

감옥에서 나와 맑은 하늘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향한곳은? 이순신은 사형을 면했을 뿐 여전히 중죄인이었고 선조가 내린 벌은 백의종군이었다고 해요. 백의종군이란? 흰옷을 입고 군사를 따라간다, 보직해임과 유사하다고 해요. 다른 장군을 보좌하거나 공을 세워 만회하도록 한 처벌이라고 해요. 결국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보직 해임된 이순신. 

그리고 백의종군을 위해 떠나야 할 곳은? 합천 초계에요.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의 진영으로 향한 것.

 

 

권율 밑에서 작전 지휘권 없이 복무해야 할 상황인 거예요. 그리고 합천 초계로 가던 중 이순신에게 전달된 한 가지 소식, 소식을 듣기 전 예지몽을 꾼 이순신, 

 

 

옥에 갇힌 것으로 알고 이순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돌아가신 어머니, 옥중의 아들이 걱정돼 한성으로 향한 어머니, 여든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배편으로 출발한 어머니, 그런데 그 배가 닻줄이 풀리면서 떠내려간 것, 아들을 보려는 애끓는 심정에 목숨 걸고 나선 어머니.

이순신과 어머니는 남달리 애틋했다고 해요. 이순신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거든요. 게다가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유일하게 기댈 곳이자 평생의 자랑이었던 아들인 거죠.

 

난중일기의 첫 번째 기록은? 2539일 동안 써 내려간 이순신의 난중일기.

 

 

무려 100여 번 이상 등장하는 어머니란 단어, 

 

 

이순신의 가슴을 찢어놓은 또 다른 사건, 죄인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장례는 허락되지 않았죠.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상황에 죽음까지 생각한 이순신.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백의종군을 위해 초계로 떠나게 됩니다. 1597년 7월. 그리고 이순신에게 날아든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조선 수군이 모두 궤멸했다는 것. 이순신이 복귀할 곳 마저 사라지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10년 먼저 급제한 대선배입니다.  1593년 삼도 수구 통제사로 승진하며 원균의 상관이 된 이순신.

이순신이 머뭇거리면서 전투에 나가지 않는다고 이순신을 모함했습니다. 

 

 

이순신에게 더욱 화가 났을 선조, 1597년 이순신 대신 산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판옥선 160여 척을 모두 동원해서 선조의 명령에 수군을 총동원해서 부산으로 가서 싸우는데 결과는 대패죠.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칠천량 해전.  60여 척의 판옥선은 물론 수군들까지 잃게 된 참패. 결국 해상 진출로를 내주게 되었죠. 칠천량의 참패로 조선 수군은 사실상 전멸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손쉽게 상륙해 한성으로 진군을 합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운 이순신, 

 

 

패전 이후 선조가 이순신에게 교서를 내립니다. 

 

 

칠천량 해전 한 달여 후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라로 임명한 선조. 이런 글귀까지 남깁니다. 

 

 

선조의 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순신. 그런데 군사가 없어요. 칠천량 해전 대패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조선 수군. 군관 9명 병사 6명 이게 전부고 병력은 물론 배 한 척 없는 상황.

 

 

직접 백성들을 설득해 수군을 모은 이순신. 하지만 조선 수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없었으니 그게 바로 배죠. 하지만 이순신에게 들려온 반가온 소식이 있었습니다.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겁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배들이 이순시에겐 구원의 배로 돌아온 거죠. 이순신의 복직 소식에 칠천량에서 도망친 장수들까지 합류를 하고 선조가 편지를 보냅니다. 

 

 

이순신에게 육군으로 싸우라는 선조. 이 이순신의 선택은? 선조의 명령에 이순신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막아야 한다는 판단에 더 이상 바다를 내줄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결심.

 

 

1597년 9월 14일 당시 왜선의 규모는 300여 척, 반면 조선 수군의 배는 총 13척.

불리한 전세에 흔들리는 병사들, 울며 돌아가는 길목인 울돌목, 울돌목을 한자로 하면 명량이라고 해요! 

이순신이 명량을 선택한 까닭은? 폭이 비좁아 급격히 물살이 거세지는 게다가 암초에 부딪힌 물살이 회오리치기까지 수적으로 불리하니 적선을 차례차례 격퇴하려는 전략인 거예요.

명량을 지목한 뒤 장수들에게 건넨 말은?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을 불러 모은 이순신.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순신 자신의 다짐이기도 한 말이라고 해요.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이 있는 명량으로 공격해온 적선들,  압도적인 차이인 133대 13의 싸움. 

 

 

이순신 명령에 출정하는 13척의 배. 그런데 경악하고 분노를 하게 됩니다. 

 

이에 머뭇거린 12척의 배, 아군의 배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는거예요. 두려움에 떤 조선 수군. 

약 400미터 넘게 멀어진 대장선과 12척의 배. 칠천량 대패 이후 기세에서까지 밀린 조선 수군. 방법은 단 하나 홀로 싸우는 거에요. 133척의 적선 앞에 홀로 놓인 이순신의 배. 이순신은 홀로 전투태세에 돌입하게 됩니다. 약 한 시간 동안 홀로 싸운 이순신. 

 

 

대장선 장수들에게 다급히 내린 명령, 적선을 떼어내려 화포를 옮긴 대장선 , 그러나 끝도 없는 적선에 화살만 쏘아대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긴 낫으로 내려찍습니다. 기어코 접근한 일본군에 백병전으로 맞선 조선 수군. 그런데 10분 후 

 

 

이순신의 외침에 접근하는 2척의 배. 그제야 뭉친 조선 수군들. 하지만 13척의 배로도 어림없는 상황이죠.

 

1597년 명량해전 당일 오후 1시. 전투의 흐름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명량은 하루 4번 물살의 흐름이 바뀌는데 게다가 물살을 거스르기조차 힘들어요. 그리고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물살이 바뀌게 됩니다. 역류를 타게 된 일본 함대. 일본 함선들이 판옥선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된 것. 

물살을 타고 일본 함선으로 진격하는 이순신, 뒤바뀐 물살의 흐름에 휩쓸리는 일본 함선들, 반격의 기회를 살려 공격을 퍼붓는 이순신.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낸 이순신. 이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에요.

명량해전은 10배 이상의 전략 차를 극복한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 보기 드문 해전이라고 해요.

 

 

명량해전 후 이순신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이순신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597년 이순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련. 명량해전을 마치고 약 한 달 뒤 1597년 10월 

 

 

소리 높여 슬피 운다. 편지를 보고 목놓아 우는 이순신. 

이순신의 셋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 갑작스러운 비보.  한 달 전 패배를 복수하려 일본군이 습격한 것. 이순신의 본가인 아산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돌아온 건 아들의 죽음. 

 

 

어머니를 잃고 아들까지도 잃은 이순신의 참담한 심정, 아끼던 막내아들까지 떠나보낸 이순신. 그리고 죽은 아들을 보러 갈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 

 

 

자식을 잃고도 마음껏 울지 못한 이순신, 몸과 마음의 고통을 속으로 삭이면서도 이순신은 조선수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다합니다. 1597년 10월 말부터 약 4개월간 수군 재건 사업에 돌입합니다.  1598년 2월까지 함선 40여 척과 병력 2000여 명 이상 확보, 난중일기 정유년에만 보이는 표현이 하나 있어요.

10월 14일 셋째 아들이 죽은 소식을 전해 들은 날  

 

 

1597년 11월 1일 수군 지를 보화 도로 옮긴 추운 날,  도일여 년, 하루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묵묵히 견뎌낸 이순신. 통절한 심정이 담긴 1597년 이순신의 기록.

명장 이순신 뒤에 가려진 인간 이순신, 그의 슬픔과 고돼도 함께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출처: tVN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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