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12시 일왕의 목소리가 담긴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1945년에 촬영된 만세 사진은 한결같이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죠.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며 만세 하는 모습인데 1945년 당시 대한제국보다는 조선이 더 익숙했기에 조선이라고 말한다고 해요.
언제 들어도 가슴 벅찬 만세 삼창의 그날
과연 사진 속 이날은 언제일까요?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광복절 1945년 8월 15일일까요? 그런데 사진이 찍힌 날은 8월 15일이 아닙니다. 광복 하루 뒤 8월 16일에 찍힌 사진입니다. 왜 조선인들은 8월 15일 환호하지 않았나. 우리가 몰랐던 8월 15일 이후 해방의 뒷이야기.
8월 15일 경성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45년 8월 15일 정오 12시 경성에서 예정돼 있던 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잘생긴 외모로 회자됐던 이우, 1912~1945년.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장남.
이우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갑자기 사망한 이우.
조선의 왕자 이우가 일본에서 죽은 이유는 뭘까? 바로 일본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사건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상공,
4000도의 열 폭풍과 함께 도시를 휩쓴 화염, 핵폭탄으로 초토화되어버린 히로시마. 그리고 무수한 희생자들, 영상만 봐도 핵폭탄의 위력이 느껴지죠. 연합국의 항복 요구를 무시한 채 침략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을 종식할 방법으로 핵폭탄을 투여했죠.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에 피폭되고만 이우, 광복 8일 전 8월 7일 새벽 히로시마에서 사망합니다. 이우는 일본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8월 15일 정오 12시 이우의 장례식이 경성에서 예정돼 있던 거죠. 12시에 치러지기로 했던 이우의 장례식이 연기가 되고 벽보가 나부끼기 시작합니다.
낮 12시에 중요한 방송을 할 테니 라디오를 들으라는 내용. 어느덧 방송이 예정된 낮 12시가 되었고, 일왕의 목소리가 담긴 충격적인 방송이 나옵니다.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내용, 과연 그날의 풍경은 어땠을까요?
의외로 조용했던 8월 15일 경성의 번화가.
일왕의 항복 방송에도 8월 15일 고요했던 이유는? 바로 일본이 한 방송 내용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12시
번역을 봐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죠. 지금처럼 1945년 당시에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 당시 옥 음방 송이라고 하는 일왕의 방송 자체가 일본 왕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있었고, 그리고 녹음의 질 자체가 굉장히 나빴습니다. 일본 측에서도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해설방송을 준비했을 정도라고 해요. 해설자도 우리가 전장에서 졌어라는 말을 방송에서 직접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직 일본군과 경찰이 한반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죠. 만세 함성도 태극기 행렬도 없던 8월 15일
그토록 바랐던 해방의 순간, 하지만 해방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들, 8월 15일 초비상이 걸린 곳이 있었습니다.
초비상이 걸린 곳 바로 조선총독부예요. 앞에 보이는 게 광화문이죠. 원래는 궁이 있어야 하는데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고 세운 조선총독부, 조선의 심장 경복궁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그렇다면 조선총독부를 경복궁에 지은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에 조선이라는 식민지는 굉장히 특별했던 거죠. 일본 제국주의에 조선이라는 식민지는 굉장히 특별했던 거죠. 우리나라는 일본에 과거 수천 년간 문화를 전수해주는 선진국의 입장이었거든요.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위압감을 주려 궁궐 내에 지은 거예요. 식민 지배의 상징으로 지어진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광복 후에도 정부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 이르러서야 철거되었습니다. 1995년 조선총독부의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본 건물까지 철거하면서 경복궁은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죠. 조선총독부 철거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순간이죠.
해방된 이후 조선인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조선총독부는 처음 도움을 청한 곳은? 대응책 마련을 위해 일본 정부에 연락한 조선총독부, 아무런 응답이 없는 일본 정부. 극도로 혼란스러운 일본 정부는 조선총독부에 도움이 될만한 지침은커녕 일본이 항복을 결심했다는 소식조차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공식 루트로 일본이 패전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찾아간 사람은?
조선인들의 분노를 통제해줄 정신적 지주를 찾아 나선 것. 그 존재는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 여운형을 찾아간 이유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김구, 이승만인데 국외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 당시 국내에서 조선인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던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8시경 조선 총독부 이인자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납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부탁한 조선총독부, 당했던걸 생각하면 복수를 해야 할 판인데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유혈 사태만큼은 피하려고 한 여운형, 지금 일본의 가장 큰 목표는 안전이잖아요. 여운형이 조선총독부에 요구한 5가지 조건은?
1.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정치범과 경제범은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에요. 식민 지배하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조선인들,
2, 3개월간 식량을 보장할 것. 조선총독부에서 통제했던 식량과 생필품, 식량은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죠.
3.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활동에 절대 간섭하지 말 것.
5.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데 간섭하지 말 것.
요약하면 조선의 건국을 위한 활동을 방해하지 마라! 조건을 들은 엔도의 반응은? 엔도는 바로 5가지 조건을 수락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저녁 6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6일 오전 11시 애타는 심정으로 많은 이들이 모인 곳은? 일제의 잔 이난 고문이 자행된 서대문형무소.
전날 여운형이 엔도에게서 받아낸 첫 번째 요구 조건,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라. 억울하게 수감된 가족과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드디어 형무소의 철문이 열리고 무리를 지어 감옥 밖으로 나온 사람들,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아서 다시 만났다는 감격으로 여인과 아이들은 달려가 한 남자를 얼싸안습니다. 하지만 고문에 시달려 몸이 상한 상태예요. 불구가 된 아들을 보고 통곡하는 어머니, 석방된 사람들은 고된 옥살이로 참담한 모습들이었죠
같이 만세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나아갑니다. 그토록 바라 왔던 광복의 순간.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만세 행진.
비로소 8월 16일 광복을 실감하며 맘껏 기쁨을 누린 사람들, 전국적으로 울려 퍼진 만세 행진. 그리고 또 한 번 기쁜 소식이 흘러나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음을 공표.
해방 전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던 라디오 방송, 이날 처음으로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방송이 흘러나온 겁니다. 이 방송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요? 조선에 새로운 정부가 세워질 것이란 희망에 들뜬 사람들,
그리고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 조선인 순사가 맞아 죽었다는 소식, 일제를 향한 분노의 폭발, 분노가 집중된 곳은 경찰서와 관청.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일이죠.
무리하게 인력과 물자를 요구하면서 일본인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조선인들을 탄압, 일본인의 앞잡이들에게 응징을 시작한 조선인들. 많은 경찰관들은 눈치 빠르게 도망쳤고, 결국 이어진 결근 사태.
<출처: tvN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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