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상속 부분만 역사적으로 보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어쩌다 어른에 나오는 교수님들만 있었다면 공부가 재미없지 않고 정말 재미있게 공부를 했을 거 같아요.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상속을 했을까요?
건국초부터 이야기하고 싶지만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통일신라조차 자료가 없습니다. 고려전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으로부터 700~800년 전부터 확인이 가능합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서예요. 고려 후기 문신 손변의 재판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때는 고려 고종 재위 시절, 여러차례 몽골이 침입했던 시기죠. 지방관은 원님 혹은 사또라 부르죠. 지방관이 주로 하는 일은? 당시 지방관은 주로 재판 업무를 담당하는데 어느 날 맡게 된 재판으로 손변을 찾아온 한 남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재산을 남기셨는데 재산은 누이에게 전부주고 저한테는 딱 네 가지 물건만 주셨습니다. 심지어 값비싼 것도 아니에요. 이에 남동생은 부당하고 억울하다며 손변에게 재판을 청한 거예요.
상속자는 단둘뿐인 상황, 누이는 이미 결혼했고, 남동생은 어린 나이였다고, 나이 차가 제법 났던 남매예요. 여기까지 듣고 판결을 내린 손변. 과연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요?
손변이 내린 판결은 부모의 망므는 자식에 대해 같은 것인데 어찌 혼인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도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박했겠는가? 어린 동생이 의지할 데라곤 누이뿐인데 만일 유산을 똑같이 주면 동생을 양육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을까 걱정한 것일 따름이다. 동생이 장성해서 그 종이에 소장을 쓰고 검은 관과 검은 옷을 입고 장차 판결해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네 가지 물건을 남긴 뜻은 이와 같을 것이다. 어쩌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판결이네요. 부모의 깊은 뜻을 헤아린 판결이에요.
누이가 어린 동생을 돌보지 않을까 걱정해 그래서 누이에게 100% 상속 후 양육의 책임을 함께 준 것. 관을 쓸 나이면 장성하면 관 쓰고 옷을 입고 소장적은 두루마리를 관에 들고 가면 손변과 같이 부모 마음을 헤아려줄 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고려 후기엔 아들과 딸 균분상속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이것이 고려의 상속 관행이에요.
누이들이 남동생에게 더 주려고 했더니 이를 극구 사양한 남동생, 남동생이 사양했기 때문에 미담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해요. 양보해준 누이들도 사양한 남동생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던 것. 반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갑남을녀의 상속, 아들, 딸 똑같이 반반 고려에서는 부모 생전 사후를 막론하고 오히려 균분하지 않은 기록을 찾기 힘들 정도라고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조선과는 다른 고려의 역사죠. 조선 이전 또 다른 500년 전통의 고려, 가족과 친족에 대한 생각부터 달랐어요. 대부분 가족은 남자 중심으로, 친족 또한 남자중심으로 하지만 고려는 다르죠. 구체적으로 알려면 어려우니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고려시대는 아들과 딸이 같아요. 가정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아요. 최소한 가정 안에서는 남녀평등이 실현됩니다. 아들과 딸의 관계가 균분상속에서 볼 수 있듯이 유산을 똑같이 나누는 동등한 관계예요.
집안의 무슨 일이든 대개 친가를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예요. 반면 고려시대는 아니에요. 친가 외 외가 말에서부터 차이가 있는데 보통 친가라는 말은 잘 안 쓰고 외가만 구별해서 사용하죠.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친가와 외가 구분이 없어요. 나를 중심으로 거리를 측정해 같은 거리에 있으면 똑같아요.
외할버지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숙모와 삼촌이지 나와 거리도 같고 권리와 의무도 같고 누구와 친하게 지낼지는 사람마다 다를 뿐, 친가 외가 차별이 없으니 친족 관계 속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치가 똑같아요. 아들과 딸이 같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죠. 고려의 친족 범위는 나를 중심으로 사촌까지 한정하죠.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를 구분하게 된 시기는? 말은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부르지 않았죠.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서서히 친가 외가를 구분하기 시작했고 외가 붙은 호칭을 사용합니다. 일상적인 사용은 생각보다 한참 후에 친과 외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가족 구성과 분위기도 고려시대는 남자보다 여자 중심으로 결혼 후 어디에서 살까?
고려시대 표준 가정은 딸과 사위와 외손주와 생활을 했어요. 고려시대 남성들이 처가살이하게 된 이유는? 처가의 도움받기 위함이 아닌 장인 장모를 모시는 사위가 있었다는 것. 교수도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이유를 물은 것일까? 질문의 이면에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왜 했는지 물어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이런 선입관을 배제하면? 편한 대로 정해진 게 없다면 편현대로 결정했을 것.
옳은 쪽 말고 편한 쪽 아마도 처가살이를 선택했을 거라고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남성이 바깥일 하는 동안 살림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죠. 여성이 집에 더 머무르는 특성상 여성이 더 편한 곳을 주거지로 우선 고려한 거죠. 물론 정해진 게 아니기에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대개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고 해요. 아내가 남편 집에 들어가 시집살이하기도 하고 부부가 따로 독립해 살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처가살이 비율이 더욱 높았다는 사실.
이런 경우 남편보다 부인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죠. 고려 유명 학자들이 남긴 처가살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규보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을 보면 ,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처가 도움받으며 생활하는 것이 트렌드라고 해요. 처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만족도가 높다고 해요.
이색은 우리나라가 처가살이를 하는 건 오랑캐 풍습이 동방에 물든 거라며 처가살이하는 그 이유가 중국이 아닌 오랑캐 풍습이라고 주장, 남자들 가운데 일부 유학자들은 처가살이를 부정적으로 인식, 속으로만 옳지 못한 관행이라고 생각 하지만 당시 트렌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우물쭈물하는 사이 고려가 멸망하게 되죠.
고려시대 가족문화의 경우 여성의 역할이 컸으며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재산 또한 균분이죠. 아들 딸 차별 없이 똑같이,
상속은 왜 할까? 재산을 남기는 이유는?
나의 죽음 이후를 부탁하는 것. 묘 관리 잘해주고 1년에 한 번이라도 정성스레 제사 지내주고 나의 존재가 대대손손 기억되도록 이 모든 것이 제사라는 의례로 표현을 하죠.
아들과 딸이 똑같이 상속받았다면, 제사는? 똑같이, 집집마다 돌아가며 진행하고 차례대로 돌아가다 윤회.
윤회 봉사는 아들과 딸 등 자손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거에요. 그러니까 제사도 똑같이 하는거죠. 제사는 결코 녹록지 않죠. 옛날엔 비용도 더 부담되었죠. 윤회봉사 사례가 고려 문인인 이색의 시에 남아있는데 이색의 시문집인 묵은집에 실린 시를 보면 젊은 시절 어느 집 제사에 참석했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에요.
여기에서 어느 집 제사는? 장모의 친정어머니 제사인 거예요. 장모의 친정어머니는 장인의 장모죠. 그냥 간 게 아니라 제사 지내기 위해 참석을 한 거예요. 14살 때 과거시험을 1차 합격하고 성균관에서도 탁월한 성적이었던 이색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19살에 결혼을 하죠. 결혼식 전날 밤까지도 서로 사위 삼으려고 당대 명문가끼리 경쟁을 했다고 해요.
사위 영업에 성공한 당대 최고 세력가인 권한공의 아들 권중달, 권한공의 손녀딸과 이색이 결혼을 하죠. 반면 이색은 평범한 집안 출신이에요. 젊은 시절 생활비는 처가에서 받았을 거라고 해요. 지원받은 생활비 중 원 재산은 장모가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일 거라고해요. 이색의 시에 나오는 대목을 보면
장모의 친정어머니 땅 수입으로 나도 배가 부르다는 것. 장모 친정어머니의 재산이 장모에게 오고 그게 아내에게 오는 거죠. 상속받은 부인의 재산으로 생활했던 이색, 장인 장모가 돌아가실 경우 사위에게 상속하지 않고 딸에게 상속합니다. 상속의 절대불변의 원칙이에요. 상속은 피를 따라 흐른다.
여성의 재산 소유는 이혼할 때도 그대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재산만 있으면 언제나 든든하죠. 생계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생각보다 이혼이 많이 행해졌다고 해요. 이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재혼도 가능하다는 의미이죠.
수절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죠. 결혼 후에도 균분상속을 하고 심지어 이혼할 때도 재산을 유지합니다. 처가살이와 여성의 재산 소유는 남자가 처가에서 자기 물건 챙겨 나가면 끝인 거예요. 그렇게 여성의 재혼이 자연스러워지죠. 남성 또한 이혼 및 재혼 가능성도 있죠.
고려 고종 재위 시절, 문신이었던 권수 평은 가난한 집 아들이었어요. 국왕의 친위군인 견룡 군에 임명되었죠. 왕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요직으로 남성 또한 이혼 및 재혼 가능이 있죠.
인위 부대에 임명받은 후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돈, 지위에 맞게 잘 갖춰 입어야 하는데
반면 친구들은 화려해서 친구들이 그에게 권유하기를 부인을 바꾸라고, 돈 많은 아내와 재혼하는 환승 결혼. 권수 평은 결국 요직을 반납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권수평은 이례적인 사례예요. 한마디로 환승 결혼하는 경우가 다수라고 해요. 그만큼 고려는 재혼이 흔했죠.
처가살이하는데 일부다처라니, 몽골과의 전쟁 후 국가적 문제다 보니 박유라는 한 관리가 왕에게 일부다처제를 제안하는데 여자보다 남자 비율이 낮고 인구감소 문제도 있으니 일부다처제를 통해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죠. 얘기가 퍼지고 퍼지며 개경 시내에 쫙 퍼지죠.
부처님 오신 날 열린 연등회에 참석을 위해 행차한 국왕을 호위 중이던 박유는
일부다처제는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중단을 하죠. 뿐만 아니라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는 일부일처제다. 고려는 남녀 지위가 동등하다 조선과는 고려 분위기가 달랐죠. 오늘날 우리 상식과도 비슷한 고려, 들으면 이해되는 자연스러운 문화죠.
<출처: tvN 어쩌다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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