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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어른 92회 - 리더의 조건 II - 설민석 강사 1

by 로토루아8 2017.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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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저술한 책의 이름은?

우등생은 자산어보!

그아래 학생들은....? 월간낚시...ㅋㅋ

과거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역경극복이 필요한 때!

광해!!

그러나 과거의 광해군은??

천하의 패륜아에 폭군으로 평가절화되어있다가 오늘날 들어서 재조명됌.

1592년 임진년에 벌어진 임진왜란.

당시 왕은 선조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을떠나 의주로 피난을 감.

전쟁이나고 피난을 가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하고 조정을 반으로 나누는 분조를 지시

선조가 피난하는 사이 전장을 누비며 백성을 위로한 광해군.

또 다른 중요한 나라. 여진!

여진족은 거칠고 용맹스러운 야수같은 부족으로 통일을했을땐 힘이 어마어마했을정도.

명나라의 도음도 거절할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여진족.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

7년동안 왜란을 겪으면서 조선과 명은 국력이 약해진 상태 

때는 광해군 8년.

후금이 명을 공격하고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한 명.

조선과 연합해 후금을 물리칠 계획이었는데 조선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래서 내린 결론이

실리외교였지만 당시엔 반대 의견이 존재.

광해는 멀리 내다보고 결정하는 진중한 이미지이지만 중립외교 반대 세력은 서인들.

주로 악역으로 나오는 서인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펄친이유와 서인이 반대한 이유는 당대상황해서 생각해봐야할 사안이라고해요.

명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왕이기때문!!!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중종 서자의 셋째아들로 조선 최초 방계 출신의 왕입니다.

이때문에 생긴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그래서 선조는 다음 왕만은 적장자에게 물려주겟다고 결심을 했다고.

조선시대에는 정실부인의 큰아들을 우대하는데 하물며 왕실은 혈통이 더욱 중요할 수 밖에!

왕비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던 선조.

공빈김씨가 나은 두번째 자식이 광해.

성격이 더럽다고....ㅋㅋ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두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에 방화

그리고 입해군의 집도 활활 탓는데

포악한 성격 탓에 잃어버린 민심으로 동생인 광해가 왕이됩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정실부인아들도 아니고 후궁의 둘째아들이라고 태생적 약점을 공격.

신흥 강국 후금은 커져가고!!!

그래서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친 첫번째 이유!!

그리고 중립외교의 두번째 이유는?

외교에서 중요한 요소는 정보!!

임진왜란도중에 여진에 정탐꾼을 보내서 끊이엄시 관찰했는데 선조에게서 받은 광해군도 수시로 관찰했다고해요.

충격적인 정보를 입수!!

슈퍼파워 여진족

부산에서 한양까지 약 20일 소요. 심지어 걸어서 그야말로 파죽지세!

두팀으로 갈라진 왜군은 

평양으로 못간 가토 기요마사의 목표는 선조를 못 잡는 대신 함경도를 점령한다!

북상하라! 북상하라!

그러던 중 만난 무시무시한 상대!

여진족

후퇴하며 느낀 깨달음.

일본이 조선에대해 몰랏던것. 첫번째 이순신의 존재 두번째 의병들의 자존감. 세번째는 여진족

그리고 중립외교를 했던 세번째 이유는?? 임진왜란을 통해 얻은 경험!!

세자 신분으로 의병을 이끌었던 광해군은 직접보고 느꼈던 전쟁의 참상.

거두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한 처참한 광경.

절대로 전쟁만은 안된다!!

광해군의 확고한 외교 입장!!

그러나 서인은!!

광해군과 반대 입장으로 정권을 쥐고자 매 순간 감추고 잇던 발톱.

서인들은 무리한 공사로 사치를 부리고 한나라의 군주가 사술에 빠졌다고.

그리고 직접적인것은 폐모살제!

어머니를 페하고 형제를 죽이다.

왕좌를 지키기 위해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의 죽음으로 새로 혼인한 19세 인목대비!

나이어린 새엄마에 새엄마의 아들 영창대군까지

아버지 선조의 죽음 이후 나라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

 인목대비 아비도 죽이고 당시 8살이던 영창대군을 밀실에 가두고 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이는 증살.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를 죽인 폐모살제.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하여 이로 일어난 반정!

이것이 인조를 왕위에 올린 인조반정!

인목대비가 남긴 교서.

폐위된 왕으로 군으로 떨어짐.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로 폐위된 왕의 기록은 일기로.


이번에는 왜 인조는 왜 서인은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택했는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풍전등화로 치닫는 조선의 운명.

첫번째는 사상적 명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명! 임진왜란 이후 급격히 국력이 쇠한 명 이제는 우리가 명을 도울때!

두번째는 현실적 명분.

서인들이 생각하기엔 모든 분야에서 아시아를 호령한 명은 지금의 미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것.

모든 면에서 긴밀하게 얽힌 조선과 명의 관계로 명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NO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일.

그리고 세번째는 새로운 정권의 등장과함께 정책이 바뀌지만 중립외교를 택한 광해군과 북인을 빼고는 인조반정 공신들 서인 대부분은 친명배금에 찬성하고 친명배금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함!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는

왕이 되려면 명나라한테 인정을 받아야하니까 명에 인정받기위해 친명정책을 선택!

결과로만 보면 잘못된거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1등 공신에서 제외되고 변방파견및 역모 누명까지

잇따른 푸대접에 분노가 생겨 반란을 일으킨 이괄 하지만 실패!!

살아남은 반군들이 후금으로 도망을가

안그래도 조선 침략 기회를 엿보던 후금에게 명분이 생긴 것!!

정묘호란!!

평양까지 오는데 약 10일!

근데 인조는 더빠름..ㅋㅋ 강화도로 피난감.

형제관계 타협한 조선과 후금.

후금의 무리한 공물 요구! 모든 부담을 떠안는 건 백성들.

마침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가 승하하고 

조문 사절단을 보낸 후금 가져온 국서에는 

조정의 전각이 좁다는 이유로 후금 사신들은 금천교에서 설치된 장막에서 조문을 하게해 푸대접에 분노한 후금사신들.

조선의 첫번째 실수!!였고

두번째는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개칭하고 왕이 황제가 됌.


<출처: otvn  어쩌다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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