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개인적인 소재 또는 탐미적인 이야기들 이런데 잡혀 있었다면
이런 인식을 갖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거라고해요.
그 때 당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평화시장 노동 환경 개선에 모든걸 바치겠다고 결심했고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 받은 지식인들.
2차 산업 성장의 중점은 품팔이 노동이고 공장제 노동으로 바로 직전까지 전 국민의 80%가 농민이었는데 급격한 산업화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 됌.
같은 해 10일 박저으히 대통령의 유신체제 선포!!
유신헌법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발판 마련을 위한 것으로
유신 헌법에 대해 비판해도 걸리고 논의해도 걸리고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예술인등 유신 반대 재야 세력을 형성
그래서 대중문화운동을 결심했다고해요.
그래서 구로 공업단지에 찾아가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몇 군데 퇴학맞은 다음에 무슨 공업학교 야간부 토목과로 졸업한걸로 되어있고 해병대를 제대해서..위장취업이 쉬웠다고
주변에 이야기를 듣고 손학규가 날 찾아왔다고해요.
경기중학교면 당연희 경기고등학교 갔을거고 그럼 서울대 갔을거고
손학규를 위해서 도계 중학교 졸업장을 어떻게 끊어서
취업시켜줌.
근데 문제는 연탄을 꺼트린다고
그리고 서울대 학생들의 위장 취업이 발각되고
결국 위장 취업을 중단하고 도피했다고해요.
하지만 손학규 전 의원 등은 검거돼 징역살이를 했다고하네요.
노동운도은 작가나 문인이 기분에 의해서 갑자기 노동자를 설득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스스로 자각이 필요하고 노동운동을 하려면 인생을 바쳐야 한다고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다 바치고 수십년을 바쳐 얻은 결과라고
좋은 감동도 주고 정서도 나누어서 많은 이들과 뜻을 함게 모을수 있지 않을까
전통사회에 대해 모르고 나는 아스팔트 보이라고 도시사람이라
농촌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전무함.
대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해 온 황석영은 문화 운동의 목적으로
연극 문화패 조직을 결심
호남으로 가게된 또 다른 이유는 문화 운동!
잃어버린 고향처럼 읍내가 있었다고
절친 화가 여운의 소개로 해남에 정착해
8개월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왔던 김남주 농민들을 조직해서
농촌 문화 운동에 뜻을 모은 두 작가.
독서회를 만들었다고해요. 사랑방 농민 학교
지식인-농민 함께 어우러진 독서모임으로 1년사이 200여 명의 사람이 모인 농민학교
더 나아가 해남 농민 잔치라는 걸 기획을 합니다.
농협을 의인화하자.
농민잔치에 전남대, 조선대. 광주 대학생들이 참여
광주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광주 대학생들에게 마당극을 가르치고
광주 시내에 책을 빌려주는 현대문화연구소 개소하여
녹두서점과 현대문화 연구소 두곳을 중심으로 광주 문화패를 형성했다고해요.
그런데 신군부가 들어서요.
바로 1979년 벌어진 12.12 사태
최규하 권한 대행을 내세워놓고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하게된 전두환
그게 80년 5월 17일의 일이에요.
박정희 군부, 2년 간의 군정 기간
신군부도 군정을 일년정도 하겠지 그동안의 우리는 민주화세력을 끌어모으자!
소극장은 문화패의 근거지이자 현장 공연의 발판이 될거라고
소극장설립을 위해 출판 인세를 기부하려던 황석영은
그런데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으로 급한 마음에 한달음에 서울행
돈을 받아 내려가기 위해 주말을 서울에서 보내야 했던 황석영.
1980년 5월17일 이대에서 열린 전국대학 총학생회의
방금 계엄사령부에서 학생들을 잡아갔습니다.
계엄사에 검거된 녹두서점 동료들.
검거를 피하기 위해 서울에 남아야 했던 황석영.
서울에서 대책 마련을 위해 모인 재야 인사들
소식이 전보를 통해서 올라오고 유인물도 올라왔다고해요.
그 다음에 외신기자들이 기독교게에 자료를 많이 주고 갔고
광주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기독교계
이 소식을 옮겨 적어 곳곳에 전달했고
그리고 서울로 도망온 사람들을 나누어 도피 은신시킴
어머니 아이들을 위해 귀가했지만
소식지로도 다 전달되지 못했던 당시 광주의 참상.
이책을 통해 본 1980년 5월의 순간
5월19일부터 이미 살상이 시작됨.
상처에 따라 다친 날짜 확인이 가능해요. 5월18일 타박상은 곤봉으로 서민들을 진압했고 쇠심을 박은 물푸레나무 곤봉을 사용했다고해요.
인마살상용으로 머리를 맞을 경우 즉사하고
생존권 투쟁을 위해 적극 항거에 나선 시민들
20일 저녁이 결정적인 것이 계속 희생자가 생기니까
광주 시내 전체에서 운수 노동자들이 이걸 보고
택시운전사들이 부상자를 싣고 가면 계엄군이 차를 세워서 부상자를 끄집어내서 또때리고 질질 끌고 가는 것을 운수노동자들이 보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점인 순간
21일부터 계엄군의 조준 사격 시작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무장을 선택한 시민들
계엄군은 군민의 군대가 아닌 폭도 비정통적 군대 반란군
신군부 정권 장악을 위해 꾸려진 사병으로서
광주 시민을 폭행한 거에요.
마치 사냥개를 조련하듯 혹독한 훈련으로 적개심을 조성하고
당시 공수부대원의 수기에 등장한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수많은 사람이 맞고 죽어가는 동안
신문에는 한 줄도 들어있지 않았음
이미 계엄군에 의해 통제된 대학가 방송과 언론이 다 통제됐으니까
그래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작업을 하게 됐다고
광주의 기록이 엄격히 금지됐던 당시 모두가 집필을 거절했던 상황.
책임 집필을 부탁하면서도 반신반의했던 후배들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한다.
한국 작가로서의 신념
엄처시하란? 역사라는 엄처에 묶여사는 작가를 말하니다.
작가적 자유쟁취가 힘든 한국의 작가
남겨진 자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영화속 장면처럼
이땅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묻고있는가?
진짜 꼭 우리가 기억해야할 순간이고 시간이고 그분들을 잊지말아야합니다.
지금 누리는 평화의 순간들이.. 이분들의 희생덕에 있는거잖아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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