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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신병주 나눌수없는 권력, 왕과 아들. 조선왕위계승사.

by 로토루아8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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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강의는 우리가 모르는 내용들이 넘많아요..ㅠㅠ

그길은 역사를 학교에서는 너무 간단하게 배운거 같아요.

흔히 생각하는 왕의 존재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자라고 생각하잖아요. 왕의 아들은 모든 것을 누리는 금수저일까요?

그러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거나 부자간의 권력다툼도 많았던 조선 왕실.

500여 년간의 조선 왕위 계승사를 돌아보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알아보는 시간.

조선의 27명의 왕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진짜 열심히 외웠는데 말이죠.

의미있는 왕위 계승사를 다룰 예정임.

왕의 아들이라고 해서 전부 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왕위계승의 중요한 원칙인 적장자.

적자의 반대말은? 서자임.

그렇다면 적자와 서자의 차이는?

조선시대 적장자 출신의 왕은 몇명일까요?


적장자 출신 왕은 27명중 7명 밖에 안됨.

원칙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죠. 적장자 출신 왕이 적은 이유는?

1. 왕과 왕비 사이에 후사가 없거나 

2. 적장자 왕세자가 일찍 죽거나 

3. 권력 다툼으로 인한 왕위찬탈.

원칙을 강조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왕위계승. 

어떤왕은 종으로 끝나고 어떤 왕은 조로 끝나는.. 왕의 호칭인 조와 종의 차이는?

왕 관련 강의할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라고해요. 조, 중, 군의 차이는??

조선의 왕은 생전에 자신의 호칭을 알수 없어요.

제 10대 연산군, 제 15대 광해군.

그래서 폐위된 왕은 묘호없이 왕자 시절 호칭으로 부름.

그렇다면 조와 종의 구분은?

묘호를 정할때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는데 

그런데 묘호를 후대에서 바꾸는 일이 발생해요.

원칙은 나라를 창업한 왕은 조 그외는 종임.

고려의 조는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뿐이죠. 그런데 조선은 조가 여럿임.

묘호가 종에서 조로 바뀐 왕은? 세조임

세조의 왕위 찬탈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예종, 한명회, 정인지등.

선왕의 묘호를 정할때 종대신 조로 해야 자신들의 위상과 권위도 올라간다고 판단함.

또 다른 예로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

처음엔 선종이었던 선조.

나라가 새로워졌다고 아버지 선종의 묘호를 선조로 교체함

영조 정조 순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가 많아짐.

영조, 정조, 순조 중 가장 먼저 조로 바뀐 왕은 순조임.

제 25대왕 철종때 실권자는 제 23대왕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임

그래서 순종을 순조로 바꿈.

그래서 영종이 영조로 정종이 정조로 바뀜.

헷갈릴 수밖에 없는 묘호. 조선후기 추숭작업으로 인한 산물이에요.

본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불릴지 모르죠.

적장자라는 원칙때문에 발생한 분란과 혈투.

제 3대왕인 태종은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맏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

아버지가 제1대왕 태조가 막내인 방석을 세자 책봉했던 것에 대한 영향으로

첫번째 왕세자는 막내아들인 방석이 당첨.

맏아들 방우가 있는데 왜 막내를 세자로 했을까요?

조선 건국 1392년은 태조 이성계 당시 나이가 58세임

스물한살 연하인 신덕왕후 강씨 부탁에 마음 약해진 태조. 그리고 정도전까지 합세함

조선은 왕보다는 신하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방석을 추천.

정통성 있는 후계자인 방우보다 자신이 다루기 편한 어린 방석이 더 낫다고 판단함.

결국 세자로 책봉된 방석.

4년후에 세상을 떠난 신덕왕후 강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방석의 세자 책봉을 계기로 방석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사건이죠.

그러나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이방원.

실록에 기록된 방우의 사인

방원에 의해 왕이된 제 2대 왕 정종인 방과 

방원은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왕세자를 거친 후

피를 묻히고 권력을 잡은 태종의 마음도 편치 않았겠죠?

태종은 원칙을 지키고자 불사한 일들이라고 내 자식들에게는 그러지 않으리.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함.

양녕대군은 태종의 적장자로 11살에 왕세자로 책봉됨.

왕자시절 명나라 사신으로 간 경험이 있었던 태종.

양녕을 보고 나보다 낫다며 양녕에게 기대를 걸었던 태종. 양녕이 시도 잘쓰고 글씨도 잘쓰고

그러나 양녕에게 있었던 결점.

뛰어난 학자들을 데려다 세자 교육에 힘썼던 태종.

하지만 양녕대군은 공부는 노잼. 몸이 아프다고... 선생님이 나랑 안맞는다며 세자대신 환관들이 매를 맞음.

계속되는 양녕의 비행. 기생들과의 추문.

지금이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등극할거라고함.

초궁장은 정종이 총애하던 기생임.

여기서 끝이 아님. 

태종이 기생에게 비단을 주며 이별을 종용하기도함.

적장자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양녕이 잘못해도 계속 기회를 준 태종.

그러나 태종을 건드린 결정적인 계기가 어리와의 스캔들이에요.

기생 출신이 아닌 원로대신 곽선의 첩이었던 어리. 한마디로 임자 있는 여자죠.

더 결정타는 결국 아이까지 임신을 함.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게된 부자.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문.

태종의 후궁의 무려 9명이었어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림.

결국 신하들도 양녕의 폐위 문제를 거론함.

태종도 대안이 없었다면 세자를 양녕으로밖에 갈수 없었다면 어떻게든 더 달래고 잡았을 텐데

충녕대군은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부지런하니

나랏일을 부탁함이 마땅하고 백성들이 소망하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노라.

태종실록 1418년 6월 17일

원칙보다는 실리를 따른 선택이에요.

유교국가인 조선은 적장자 계승 원칙을 대신할 논리가 필요함.

신하들의 의중을 떠본 태종

눈치껏 태종의 마음을 읽은 신하들.

그로써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태종이 효령대군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태종실록 1418년 6월 3일

중국 사신을 접대하려면 술 한잔은 할줄 알아야한다고

효령은 미소가 투머치하다고함.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효령대군.

효령도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첫째 양녕을 찾아간 둘째 효령.

일찍이 왕위에 대한 기대를 접은 효령은 불교에 귀의합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효령은 채식, 소식, 금주,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91세까지 장수함.

왕위를 두고 형제간에 칼을 겨눈 태종. 반면 우애가 좋았던 그의 자식들.

왕의 형으로 살아가는 것도 고달픈 일이죠. 역모의 구심점이 되는 존재.

세종보다 오래산 양녕. 

양녕과 효령의 장수 비결은 형들을 보좌한 세종의 인품이에요.

그런가하면 정변의 중심에 섰던 세종의 자식들. 그에 비해 우애가 깊엇던 태종의 자식들. 냉혹한 이미지의 태종 하지만 반전 이미지도 있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왕과 아들인 태종과 양녕대군.

다음은 조선후기에요. 양녕과 다르게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

그러나 왕이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왕세자.

소현세자 그리고 아버지 인조.

역사 교사 대상을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왕세자 중 부활시키고 싶은 인물이 소현세자라고해요.

교명문이라고해서 세자를 책봉할 때 내리는 임금의 문서.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직접 나섰던 소현세자.

정묘호란때 분조: 전쟁때 임시로세운 조정으로 분조를 이끌었던 소현세자.

부자에게 닥친 비극적인 사건.

1636년 청이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 인조와 소현세자.

조선의 항복을 요구한 청 태종 계속되는 청의 압박에 중대한 결심을 한 소현세자.

소현세자의 결기가 느껴지는.. 

1637년 1월 30일 인조,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

세번 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다.

병자호란이 남긴 비극.. 삼전도의 굴욕.

인조에게 있었던 정문 징크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날 당시

왕이 광희문으로 나가면 안되는 이유가 시신을 내보내던 문ㅇㅣ었던 광희문

광희문을 시구문으로 이용.

광희문옆에 떡볶이로 유명한 동네 신당동의 지명의 유래가

시신이 나가는 곳이라 무당집이 많이 있었던 신당이 모여 있어서 신당동.

청의 눈치를 보며 서문으로 나간 인조.

삼전도의 굴욕. 청이 내세운 조건은 청에 군신의 예를 지킬 것. 명의 연호를 폐하고 청의 연호를 쓴다.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

그렇게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조가 청에 신신당부하며 말하길

약 50일간 혹독한 추위와 시련을 겪은 부자.

당시 남한산성에서 이놎가 겪은 고난들.

피난 생활로 인해 임금의 수라상도 변변치 못했던..

어쩐지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닭다리가 반찬으로 올라옴.

인조를 위해 신하들이 어렵게 준비한 닭고기.

남한산성의 대표 메뉴가? 닭백숙이에요.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청에 대한 반감이 커진 소현.

청 태종의 잔치에도 불참하며 선을 그었떤 소현. 무려 8년간의 인질생활

큰 변화가 일어나요. 청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소현.

우리보다 훨씬 잘 살잖아요. 조선에 비해 과학기술이 더 발전해 있었던 청.

우리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

청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함. 아담 샬과 천주당에도 갔어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자란 세자에게 천주교는 새로운 사상으로 다가온 학문과 문물을 접하면서 더 큰 세상을 꿈꾸게 된 소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되면서 1645년 2월 8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

하지만 두달만에 의문사를 당함.

미스터리한 소현세자의 죽음.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

실록에서조차 나타나는 독살의 정황.

조선 왕실에서 독살됏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에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갈등이 깊어짐.

청 인질 생활중 잠시 귀국했던 소현세자.

원수인 청과 가깝게 지내자 심기가 불편했던 인조.

사실은 역사적 경험이 있어요.

소현세자를 아들이 아닌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한 인조.

정황상 인조의 독살설이 유력하죠.

당시 소현세자의 담당의인 이형익은 소용 조씨와 친분이 있던 인물이에요.

3년상에서 7일상으로 소현세자 장례식도 간소화한 인조

소현세자에게 있었던 세아들.. 소현세자가 죽었을 당시 맏아들 석철의 나이는 열살.

충분히 왕세자가 될수 있는 나이지만 너무 어리다며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왕이된 제 17대 왕 효종.

인조는 소현세자 집안 자체가 엄청 싫었던것 같다고

세 손자를 제주도로 유배 보낸 인조. 그곳에서 숨을 거둔 첫째와 둘째 석철과 석린.

사가로 쫓겨난 소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강씨.

결국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강씨.

국제적 식견을 가진 소현이 왕위를 이었다면 역사가 많이 바뀌었겟네요.. ..ㅠ

조선 왕위 계승사에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인물임.

소현이 왕이 되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더큰 세상을 꿈꾸다 잠들어버린 비운의 적장자.

적장자중엔 제대로된 임금을 한사람이 없어요.

제 5대 문종은 조선 최초 적장자 출신의 왕으로 세종의 적장자로 즉위함.

세종을 빼닮았던 문종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았음

세자 교육만 29년 문종에게 쏟아진 기대. 그러나 결혼에 실패한 문종.

문종은 유일하게 조선의 왕 중에서 생전에 왕비가 없었던 임금.

문종의 사랑을 받으려고 궁녀의 신발을 태운재를 문종에게 먹이려다 발각되어 폐출당한 휘빈 김씨.

두번째 세자빈은 순빈 봉씨는 동성애가 발각되어 폐출.

세번째 세자빈인 단종의 엄마인 현덕왕후는 문종 세자시절 단종을 낳자마자 다음날 사망함.

혼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문종은 그로부터 5년이 흐른 후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남.

효심이 지극하니까 삼년상에 올인을 합니다. 

회복될 때쯤 아버지 세종이 승하함.

세종의 삼년상을 치른 후 문종도 승하하게됨.

29년을 세자교육받고 즉위 2년만에..죽음..ㅠㅠ

조선의 여섯번째 왕인 단종은 엄엄친아임.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긴 단종.

계유정난은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김조엇,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죠.

중요 직책을 겸직하며 단종을 압박함. 즉위 3년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줌.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세조.

단종복위운동으로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수양대군 동생이자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복위 운동의 주역임

단종이 살아있는한 역모 모의는 계속될거라며 정황상 당시 17세 단종의 죽음은 세조에 의한 것일거라고

세조에게 일어난 인과응보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복수극.

나또한 네 아들을 데려갈거라며...

세조의 적장자인 의경세자.. 단종보다 먼저 죽었지만 후대 사람들이 세조의 악몽을 알게되면서 현덕왕후의 복수라고 생각함.

꿈에서 현덕왕후가 뱉은 침을 맞고 피부병이 생긴 세조.

그래서 세조도 복수를 함. 복수심에 패륜을 저지른 세조.

제 8대왕인 예조으이 맏아들 인성대군도 요절. 적장자가 자꾸 요절하는 사태가 나타남.

그래서 세종의 묘를 옮겼다고해요.

태종인 아버지 옆에 묻히겠다며 서울 내곡동에 묻혔던 세종.

태종의 무덤 터는 좋은 땅이지만 세종의 무덤 터는 절사손장자라고

세종 맏아들 문종 39세 죽음.

문종 맏아들 단종 17세에 죽음. 

세조 맏아들 의경세자 20세에 죽음.

적장자들의 연이은 죽음. 최양선 말이 맞는거 아니냐며 터를 조사해보니 물길이 흐르던 땅임.

예종 즉위후 세종의 묘를 여주로 옮김.

세종의 도시가 됨. 임금님표 여주 쌀.

적장자들의 운명은? 그이후 적장자로 즉위한 제 10대왕인 연산군.

적장자로서 오명이 폭군중의 폭군이었죠.

연산군 다음이 제 11대왕인 중종.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해

재위기간 8개월 인종도 세자 생활만 25년을 합니다.

조선왕중 최단 재위기간 8개월만에 병사함.

익숙하지 않은왕은 재위기간이 짧음.

근데 현종은 15년이나 했는데.... 잘 모름.

현종이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몸이 너무 안 좋으셨음.

온양온천 사우나 최다 이용객임. 피부병에 시달린 현종.

조선시대 신병 치료를 위해 황들이 많이 찾았던곳이 온양 온천이에요.

또다른 특징이 후궁을 두지 않았던 현종.

끝나지 않은 적장자 징크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제 27대왕 순종

망국의 왕이잖아요.

적장자 출신 왕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역할을 다한 적장자 왕도 적었던 조선 왕조.

제 19대 왕인 숙종.

숙종이 한일이 엄청 많은데 장희빈 때문에 묻힌 왕임.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 여인의 스토리가 중심이되어 숙종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았던..

열네 살의 카리스마 제 19대왕 숙종은 즉위당시 최고 권력가였어요.

실록에도 삼천번이상 등장함.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숙종.

예에 대한 해석을 중시했던 조선.

최고의 권력가 송시열에게 잘못을 지적한 숙종.

당대 최고의 권력가에 대적하며 자신의 권위를 드러낸 숙종.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 치열한 당쟁.



과거 역사학자들은 치열한 당쟁때문에 환국이 발생했다고하지만

환국은 일당의 독주를 막기위한 왕의 심판임.

서인이 집권하면 남인이 희생당하고 숙종때 환국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피의 숙청임.

환국을 통해 당쟁의 조정자 역할을 한 제 19대왕 숙종. 

제 21대 왕 영조가 탕평책의 기틀이 되는

최근 연구에서는 최초로 탕평책을 시도한 왕이 숙종이라고해요.

치마폭에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드라마에 나오지만 알고보면 붕당 정치의 중심을 잡았던 인물임.

업적들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숙종.

상평통보.

북한산성


돈대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

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는 천연두로 사망.

숙종의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대부분 정비로 생각하는데 두번째 왕비임.

숙종 21살 인현왕후 15살에 만나요. 인현왕후는 정비가 아닌 계비임.

안타깝게도 두 왕비 사이에서 후사가 없었던 숙종. 이때 등장한 여인이 장희빈이에요.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던 시기 남인의 후원을 받아 후궁이 된 장희빈.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원자임.

남인들과 대립했던 서인들의 반발.

이때만 해도 인현왕후가 계셨거든요. 당시 인현왕후 나이는 22살

장희빈 아들, 원자 책봉을 강행함.

서인의 영수 우앙 송시열은 원자 책봉이 잘못됐다.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보낸 숙종. 결국 사약을 내림.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 강력한 모습을 보였던 숙종.

부담이 상당히 크지만 남인 정권과 함께 갔다는 숙종의 의지.

장희빈 아들인 경종의 정통성을 위해 장희빈이 왕비가 돼야 한다고 판다.ㄴ

결국 장희빈을 5년만에 폐위. 인현왕후가 다시오게됩니다.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쓴 편지

뒤늦게 깨달은 중전의 소중함.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1701년 같은해에 생을 마감합니다.

숙종은 죽어서도 행복한 왕이라고.

원래 경기도 광주에 홀로 묻혀 있었던 장희빈.

1969년 도시 개발로 인해 이장해야 했던 장희빈의 묘.

그래서 숙종 곁으로 이장하게됐다고함.

왕위에 오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4년만에 요절하게됩니다.

숙종의 두 아들 20대 경종과 21대 영조 모두 후궁 소생이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적자 출신의 왕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고 후궁의 자식들이 왕으로 즉위를 함.

조선왕실 후손의 미스터리.

태종 12남 17녀 성종 16남 12녀 정종 17남 8녀 세종 18남 4녀

기본이 20명인데 

왕실의 후손이 갈수록 줄어든 이유는? 추론할 수밖에 없어요.

조선왕실 비서실의 기록인 승정원 일기를 보면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약 400여권 승정원일기 번역 가능한 예상 권수 약 5000여권.

최근 승정원일기에서 밝혀진 내용이 장수의 아이콘 83세 영조의 건강비결은 채식과 금주

10여년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 중인 승정원일기. 1년에 평균 50권을 번역중이라고함.

10년이면 500권 아직 4500권이 남았잖아요. 이진도면 90년은 걸린다고

조선왕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줄 승정원 일기.

그러나 곧 일제 침략에 무너지고 500여년 이어온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린다.

조선 왕위 계승사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걸까요?

왕위 계승사를 통해 생각해 보는 진정한 리더의 자격.

태종의 셋째아들인 세종, 예종의 조카인 성종.

후궁소생인 영조. 영조의 세손인 정조.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왕의 자질을 먼저 살폈던 영조.

때로는 원칙이 아닌 현명한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낳기도 하죠.

조선의 성군들을 통해 배울점.

백성을 우선으로 하는 애민정신.

우리사회에도 필요한 리더십.

역사의 사례를 교훈 삼아 잘못된 일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죠.

파란만장햇던 조선왕조의 실정을 반면 고사로 삼아 우리사회를 돌아볼수 있기를...

이런 강의를 티비에서도 더 많이 해주면 좋겠어용...ㅠㅠ 어쩌다어른도 좋았는데 다양한 주제라 너무 좋았음..다시 하면 좋을거같은데 이제 안하더라고요.!! 차이나는 클라스라도 오래오래 해주면 좋겠어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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