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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둑들, 피카소vs 클림트.

by 로토루아8 2021.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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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그림 두 가지를 가져와 설명을 해주면 의뢰인이 그림을 선택하는 예능으로,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에 대해서 얘기해주니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두 사람의 그림 중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나는 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독자적 스타일로 현대미술의 근간을 이룬 거장 파플로 피카소(1881~1973)와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황금빛 색채의 마술사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두거장의 공통점은 희대의 사랑꾼이란 거죠.

색을 밝힌 거장들 파블로 피카소 vs 구스타프 클림트.

색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색채의 색과 여색의 색. 두 사람 모두 색을 밝히는 화가죠. 여자들에게서 받은 감정으로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화가들이죠.

생애 마지막까지 연애를 쉬지 않은 피카소는 가장 사랑한 여인을 그린 작품이 피카소의 꿈. 입체파는 미술계에서 패러다임을 바꾼 회화로 피카소 이전에는 사진처럼 그리는 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각도에서 본모습을 평면에 구현했죠. 피카소의 새로운 시도로 현대 추상 미술이 시작됐다고 해요.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카사노바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름이 느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이죠.

 

2013년 꿈은 경매에 나왔었는데 그때 700억 원이었다고 해요. 당시 약 1720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기업인 스티브 코언이 최종 구매자라고 해요. 경매 후 판매자의 실수로 그림이 파손되었고 구매자가 거래를 취소했다가 몇 년 후에도 미련이 남은 구매자는 사고 싶었지만 복원 후 그림 가격이 급상승했죠. 피카소 자체의 브랜드 파워와 대중의 수요가 가격 책정에 작용하는데 최근 알제의 여인들이 약 1955억 원에 낙찰됐다고 해요. 피카소는 작품 수가 많아서 거래량이 활발하다고 해요.

실제로 작가 브랜드 평판 사이트에서 항상 톱텐을 유지하고 있도 합니다. 결국 작품 수가 많을수록 투자 가치가 존재한다는 의미죠.

클림트의 작품은 경매에 잘 나오지 않고 심지어 키스는 국외반출이 불가하죠. 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어 에밀리의 그림도 구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가격을 추정해본다면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을 보면 2017년 약 1719억 원의 경매 가였다고 해요. 희소성 가치로 봐서는 최소 1000억 원 이상 추정된다고 해요.

 

 

어린 시절부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실력이 탁월했던 피카소 그래서 꿈은 대충 그린 게 아니죠. 클림트 역시 14살 때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빈 응용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고 초기작들을 보면 클림트도 사진처럼 그리는 실력에 있어서 밀리지 않는다고 해요.

 

 

사랑하는 연인에게 추상성을 가미하며 변화한 화풍이죠. 

피카소의 명작 중 가장 특별한 이야기인 꿈, 그 뮤즈가 된 여성은 마리 테레즈 발테르입니다. 피카소의 뮤즈 마리의 실제 모습은 1930년대 당시 유행한 패션의 집합체로 다부진 몸매와 건강미 넘치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프랑스 파리에서 1927년 이미 화가로서 인정받았던 피카소는 길을 걷다가 한눈에 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어린 여성 마리였다고 해요. 그런데 마리는 그때 17살, 피카소는 46살이었죠. 그래서 곧장 그녀에게 돌진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고 해요. "당신은 내 예술 세계에 꼭 필요한 분입니다." 하지만 무시를 했죠.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던 피카소의 마음. 마리가 원하는 모든 걸 해줬지만 생각보다 마리와의 관계가 진척이 없자 마리이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초상화를 선물해주고 동거를 허락받게 돼 죠. 그 당시 피카소는 46세 유부남이었죠. 첫 부인의 이름은 올가

 

 

뜨겁고도 비밀스러운 마리와의 사랑을 통해 화가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꿈이야말로 자신도 몰랐던 매력을 뿜 뿜 뿜어내게 해 줄 그림이죠. 오늘의 그림 파블로 피카소 꿈 1933년에 완성됩니다.

 

 

공식 확인된 연인만 7명이라고 해요. 부인 집 바로 앞에서 동거를 했다고 해요. 화가 피카소를 알리는데 큰 도움을 준 첫 부인 올가. 

 

 

변화하는 감정을 담았을 거란 추측도 있다고 해요. 피카소는 순수했던 예술 과로 관계가 안 좋을 때 그림이 변한 것은 맞지만, 우는 여인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라고 해요.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나치가 폭격기 성능시험을 위해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이에요. 폭격의 참상을 표현한 1937 게르니카. 도라를 통해 아픔을 표현한 그림이 우는 여인이에요. 피카소의 연애사를 포장할 필요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미술의 길을 제시했다고 해요. 연인관계 때문에 그의 예술 세계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스스로 그 뒤를 따른 마리, 죽음까지 함께할 만큼 깊은 사랑을 나눴던 두 사람. 가장 뜨겁고 비밀스러웠던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사랑

 

 

클림트가 남긴 245점의 작품 중 여성을 그린 작품이 절반이라고 해요. 남성을 그린 작품은 단 3점이라고 해요. 여인들 속에서 예술혼을 일깨운 크림트의 수많은 여자들 중 특별한 뮤즈는 에밀리 플뢰게입니다. 과연 에밀리가 클림트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이유는 뭘까요?

1886년 오스트리아 빈. 어느 상류층에서 미술 선생님을 구하는데 바로 24살의 클림트 죠. 당시 에밀리는 12살이었죠. 언니 따라 화실 가서 키운 사랑이죠

 

 

에밀리의 직업은 패션 디자이너라고 해요. 당대 여자들처럼 너무 불편하게 입지 않고 레이스, 줄무늬 등 스타일리시한 에밀리만의 패션이네요. 몇 년 후 에밀리의 언니와 클림트의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돼 클림트와 에밀리는 사돈지간이 됩니다. 클림트는 독신주의자예요. 그리고 둘은 더욱 가까워지게 되죠. 클림트는 메모를 안 할 정도로 글자 혐오증이 있는데 에밀리한테는 편지를 계속 썼다고 해요. 그 편지수가 무려 400 통이라고 해요.

하지만 클림트의 화실엔 매일같이 다른 여인들이 들락거렸다는 것을 에밀리는 알고 있었죠.

 

 

원래는 400 통보다 많은데 클림트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오점이 될만한 거는 에밀리가 소각을 했다고 해요. 로맨틱한 편지뿐만 아니라 상황을 보고하는 메시지도 다수있다고해요. 에밀리는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고 그 이상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플라토닉 러브를 지킨 두 사람. 에밀리가 특별한 이유는 하루종일 그림을 그린 클림트지만 일년의 반은 여름휴가로 힐링을 했다고해요. 힐링 메이트는 에밀리였고 둘만의 여름 휴양지는 호스 트리아 아터제 호수로 배 위에서 풍경화를 그리며 휴가를 즐겼다고 해요.

 

 

클림트에게 에로티시즘을 뛰어넘은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고 영혼의 안식처였죠.

클림트가 활동했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직전 벨 에포크로 좋은 시대라는 뜻으로 프랑스 정치적 격동 기후 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유럽의 마지막 황금기였죠.

 

 

 

세기말 넘쳐나는 풍요에 예수로가 패션이 발달하던 시기예요. 당대 대부분의 여성은 무직이었는데 에밀리는 독립적인 여성인 거예요. 당시 패션 게를 주름잡았고 여성성으로 강요받던 코르셋을 벗어나 새로운 패션을 구축했다고 해요. 패션 디자이너 1세대로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파격적인 커리어 우먼이라고 해요. 100년이 지나도 그녀를 기리는 패션쇼가 진행되고 있죠.

 

 

서로를 존경할 수 있었기에 영혼의 동반자로 남지 않았을까요?

 

 

클림트의 키스 속 그림에는 에밀리가 가장 유력하다고 해요.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에밀리에게 화해의 의미로 키스 그림을 선물했을 거라고 추측한다고 해요. 미술관에 가서 보면 진짜 화려하다고 해요.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은 이전에 그린 에밀리 초상화와 다르기 때문에 클립트만의 독자적 화풍 확립 이전의 작품들, 4번째서야 클림트의 화풍이 확립되죠.

 

 

어딘지 모를 추상적인 배경과 화려한 장식미술 기법, 금은 변하지 않는 금속이잖아요. 황금으로 표현한 아름다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림 오른쪽 하단에 크림트의 사인을 보면 다른 그림보다 크다고 해요.

피카소는 자신감 넘치게 말을 잘했다고 해요.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서 8분 만에 그려줬는데 그림값으로 5천만 원을 요구했죠. 왜 이렇게 비싸냐는 말에 피카소는 저는 이 8분을 그리기 위해 40년을 노력해왔습니다.라고 말했죠. 로맨스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도 화술이 탁월했던 거예요.

 

 

닮은 듯 다른 두거장, 달랐던 건?

흔히 나쁜 뉘앙스를 가진 게 관종이란 단어인데 피카소는 대단한 관종이었다고 해요. 세련되고 옷 잘 입는 사람을 섭외하고 화랑에 가서 피카소 그림을 찾으라고 시킴. 트렌디한 사람이 피카소를 찾으니깐 영문 모르는 화랑들이 피카소 그림을 구입하게 됐다고 해요. 관종 마케팅으로 그림의 수요를 창출했다고 해요. 본인이 자기 마케팅을 하고 다니던 피카소였는데 본인이 최고의 브랜드가 된 후에는 남의 브랜딩에 오히려 이용됐다고 해요.

 

 

피카소 브랜딩 역시 그의 가치를 증명하는 거죠. 10대부터 90대까지 꾸준히 자화상을 그린 피카소. 피카소의 자화상은 관종이 아니라 솔직함의 표현인 거 같다고 죽기 저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캔버스 앞에서 순수했던 피카소.

 

 

반면 클림트는 비밀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화상을 거의 안 그렸어요.

 

 

자화상을 안 그리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을 보라고 했다고 해요. 클림트는 작품을 통해서만 자기를 표현했다고 해요. 평생 빈에서 자신만의 루틴으로 살았는데  당시 화가들은 성공하려면 프랑스 파리로 갔어요. 파리에 잠깐 다녀왔을 뿐 평생 빈에서 살았던 클림트는 빈의 화가로도 불리죠.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는 본인만의 독자적 화풍을 가지고 있죠.

 

 

클림트 역시 에곤 실레를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같은 해에 사망했다고 해요. 

피카소는 장르가 워낙 다양해서 도자기도 제작했다고 해요. 판화, 회화, 드로잉까지 45000점 정도 된다고 해요. 92세까지 살면서 노년에도 창작의지가 원기 왕성했다고 해요. 차이점도 많지만 뮤즈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건 공통점이죠. 두거장에게 특히 영감을 준 존재는 여성이죠. 마리와의 사랑이 미술의 역사를 바꾼 건 아닐까요?

여성의 신체를 성스럽게 본 예술가 같다는 클림트는 생명을 품은 여성의 몸에서 인생을 표현할 영감을 얻었죠. 사랑이 쓰라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고통이라는 구스타프 클림트. 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라고 말한 파블로 피카소. 삶의 의미는 자신의 선물 같은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을 많은 이들에게 널리 나누는 것이라는 피카소.

 

당신이라면 어떤 그림을 선택하시겠어요?

 

<출처: JTBC 그림 도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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