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에이어~ 두번째 이어지는 차이나는 클라스 안중근에 대한 강의에요!
우리가 꼭 알아야하고 모르고 있던 내용들이 너무나 많아요.
이토가 총에 맞은 시각은 오전 9시 30분경 정확한 사망 시간은 오전 10시에요.
이걸 일본이 의도해서 같은시간에 안중근 의사를 처형한 것.
지난 강연 때 우리가 느낀 것중 하나가 눈에 보이는 힘인 무력과 압력도 중요하지만
눈에보이지 않는 지력과 꼼수가 더 섬뜩하다는 거죠.
이런일이 안중근 의사 외에 또 있어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복수를 하는 거죠. 치가 떨리는 일본의 악랄함
1부 주제가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무비를 죽여야 했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일제의 한국 침탈 역사 속 안중근이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변화를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거듭났는지!
1890년대 격변의 시대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4년 청일전쟁
젊은 시절 안중근의 모습이에요. 계몽 운동을 하던 28살 무렵
지금까지 배운 위인들은 떡잎부터 달랐는데 .. 안중근은 좀 다름...ㅎㅎ
안중근이 좋아했던 4가지는?
친구 맺기가 취미일 만큼 사교성 갑임 불같은 사나이인 안중근은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중근이에요.
진해 현감 할아버지 아래 유복하게 자란 안중근은
학문을 등한시한 안중근을 나무란 친구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안중근 16살 무렵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황해도 지역까지 퍼진 동학 물결
안중근은 동학군 집안대 였어요.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기에 할아버지의 훈도아래 사서삼경을 익혔던 안중근
자연스레 성리학적 사상이 녹아들어있고 동학군이 국가 기강을 해친다고 판단함
16살 안중근은 동학 집안군 선봉작으로 출격해서 실제로 많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고해요.
상대편인 동학군에서 활약한 소년 장수는?김구였다고해요.
김구가 일본군에 쫓긴다는 소식을 듣고
김구를 청계동으로 피신시킨 안태훈
16살 안중근과 19살 김구의 첫만남
사람보는 눈이 탁월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이후 안중근 일가와 사돈의 연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양반가의 아들로 계급 의식이 뚜렸했던 안중근 그런 그가 어떻게 민족 투사가 됐을까?
그래서 안 의사가 위대한 거예요.
처음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던 안중근이 어떻게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날수 있었는지 그변화의 흐름 속에 안중근의 위대함이 있는 것.
1987년 안중근 19세가 됩니다. 의거 12년전
토마스의 도마 라고 하네요.
전통적인 유교집안이 천주교 집안으로 변화를 하면서 생긴건데
해주를 습격한 동학군과 전투후 얻게된 양곡들을 군량미로 사용했던 안중근 부친 안태훈
그런데 정부가 공을 치하하긴 커녕 군량미 반환을 요구한 것.
안태훈이 요구에 응하지 않자 위협을 가한 조정 결국 가족을 이끌고 피신한 안태훈
목숨을 걸고 동학군과 싸웠는데 돌아온건 포상이 아닌 위협임 그래서 유교적 봉건 체제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을 거라고.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니구나.. 나라를 지켰는데 벌이라니..
안태훈의 피신 장소가 명동성당이었어요.
정부의 위협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함.
예로부터 권력에 쫓긴 인물들의 피신 장소였던 성당. 외국인 신부에게 도움을 구한 안태훈
성리학적 상하 질서에 회의를 느끼던 중 천주교의 만민 평등사상에 감흥해 천주교로 입교한 안중근 일가
외국인 신부들 덕분에 군량미 문제도 해결함
그래서 천주교 입교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친 20살의 안중근
당시 국내 천주교의 대표적 인물이 뮈텔 주교였는데
그러나 단칼에 거절한 뮈텔
" 대한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종교를 믿는데 소홀해질거라며 선교하는데 방해되니 대학설립은 안돼"라고 반대하며 넌 우리 가르침이나 잘 전달하고함.
사실은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제국주의적 차별 의식을 갖고 있던 외국인 신부들
종교와 서양인을 철저히 분리한 안중근은 종교가 우리 민족을 무시한다면 내겐 종교보다 국가가 먼저다.
이 일을 계기로 배우던 프랑스어도 포기하고 한국이 부강해지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함.
그들이 우리 한글을 배울테니...!
안중근의 선교활동 당시 국내 상황을 보면
러일 전쟁에서 승전하자마자 서울을 점령한 일본
안중근은 구국을 위해 맞서 싸우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본군에 맞서기엔 역부족함 그래서 일본의 감시가 적은 중국 상해로 이동을 함 조언과 도움을 얻기 위해 해외동포를 찾아간 안중근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을 찾아갑니다.
한때 민씨 일가 최고의 권력자이죠.
당시 가장 핫했던 한국 상품이 인삼이었는데 민영익은 인삼전매권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함
구국을 위한 방법 논의와 함께 독립 자금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 민영익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안중근
누구보다 풍족하게 기득권을 누렸던 만큼 구국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민영익
그러나 돌아온건 역시 쓴소리뿐.. 이때 운명처럼 만난 르각신부
따끔한 조언을 구한 안중근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먼저 힘을 길러야 한다! 교육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할 것을 강조. 밖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다행히 작은 소득을 얻고 귀국한 안중근은
1906년 안중근 28세 의거 3년전
우리가 아는 안중근의 평소 성격이라면 바로 실행하지 않았을까요?
진남포에 위치한 돈의학교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인재양성을 시작
직접 교장으로 부임해 인재 교육에 앞장선 안중근
그러나 상해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아버지 안태훈의 사망 소식.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불효를 했지만 내가 독립할 때까지는 진짜 술 안 마시겠다.
그만큼 강했던 안중근의 구국의지.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돼 민족의식에 눈뜬 안중근은 구국을 위해 계몽 운동을 시작했지만 한계를 경험
위기의 순간 속 안중근의 다음 행보는?
1907년 안중근 29세. 의거 2년전
계몽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한 이유는?
안중근을 찾아 진남포로 온 한 인물이 있어요.
"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한국인 백여만 명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사업을 이룰 것일세."
이미 앞선 일본을 뒤쫓기란 무리이고 인재 양성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 싸우는 수밖에 없겠구나.
또한번 전환을 하는 거죠. 그래서 연해주로 갑니다.
안중그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까닭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그러자 일본군이 벌인 의병 학살
정면승부의 어려움을 깨달은 안중근은 해외로 나가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로 결심을 함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 최재형인데
안중근과 함께 항일 의병 세력의 중심 동의회를 결성.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인물이었죠. 많은 독립운동가가 활동하던 연해주는 의병을 조직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죠.
러시아 각지로 흩어진 수많은 고려인까지..이른바 독립운동의 기반이 갖춰진 환경이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훈련도 하고 안중근은 이런 상황을 보고 기대감을 안고 연해주에 도착하죠.
최재형, 이범윤 등과 대한의군을 조직한 이후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친 안중근
함경북도 홍의동,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를 합니다.
영산전투 패배 이유는 안중근 부대에 대한 상황 보고를 받은 일본은 영산으로 대규모 군을 파견함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죠. 결국 참패하고 만 안중근 부대
그런데 영산전투의 패배 원인이 안중근에게 있었음?!
포로를 잡으면 죽이기 마련인데~~ 안중근이 반대했던 것.
안중근은 왜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을까?
죽이는 대신 일본군 포로를 설득한 안중근
이토는 한국을 침략한 것이지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토의 잘못이지 너희는 잘못이 없다.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진실을 알리길 바란 안중근
"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
이토를 처단한 뒤 재판장에서 국제법에 따라 전쟁 포로로 대해줄 것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 포로사건.
일본의 기습으로 참패한 1908년 영산전투.
포로로 인해 부대의 취이가 노출되면서 부대원 300명중 20명만 겨우 생존 안중근 역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전쟁 패배후 돌아온건 동포들의 곱지않은 시선이었다고..
누구보다 힘들었을 독립운동가들..
열악한 상황 속 목숨을건 항쟁이었을거에요.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친일파들의 모습.
1909년 안중근 31세 의거 8개월 전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수 없었던 안중근은 연해주 일대를 돌며 동지들을 규합합니다.
꺼져가는 독립의 불씨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런데 이게 쉽지 않으니까 이정도로는 안되겠다.
진짜 죽을 각오로 강한 독립 의지를 결의할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심함.
동의단지회는 안중근과 11명의 동지가 조직한 비밀결사에요.
왼손 무명지를 잘라 혈서를 쓴 안중근과 동지들
감히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숭고한 정신..
진짜 저시대때 살고있다면..나는 어떠했을지... 정말 저런 운동은 꿈에도 못꿧을 거 같아요..ㅠㅠ
어차피 조국독립을 위해 바치기로 한 목숨이기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자 피로 맺은 맹세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에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꺼져가는 항일 정신을 다시 일깨우기 위한 결의
몸을 조금이라도 다치면 아프듯 모든 손가락이 다 아프죠.
가장 사용량이 적은 약지?! 중요한 건 단지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비교적 사용량이 적은 약지를 잘랐을 것.
정확한 일원의 명단은 지금도 알수가 없어요.
단지 동맹자 12명중 안중근 포함해 밝혀진 건 8명임
인재 양성을 위한 계몽 운동부터 의병 활동을 위해 대한의군을 조직함
동지들을 모아 단지 결의까지 했지만 정작 일본의 병탄을 막을 길이 없었던 상황이기에 조용히 기회를 노리던 중
1909년 10월 26일 디데이!!
이토는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한국 정권 찬탈을 주도하고 1905년 부터 1906년 을사늑약을 맺고 통감부를 설치했죠.
한국 침략의 총책임자가 제발로 안중근의 근거지로 찾아오는 상황임
절호의 기회를 잡은 안중근
한치의 망설임없이 의거를 결심함. 그어느때보다 보안이 중요하잖아요.
만약 의거가 불발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데 의거전 안중근에 대한 한 기록을 보면
그리고 이토 하나 죽인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겟냐며 측근들에게도 철저히 계획을 숨깁니다.
이토 처단게획을 함께한 동지는
우덕순은 국내 진공 작전을 함께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한 가장 믿음직한 동지
유동하에게는 러시아어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함
유동하에게 의거 사실은 비밀로 함 어린 유동하를 보호하고 의거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
실제 거사를 함께한 건 유동하가 아닌 조도선이에요.
하얼빈역의 전역인 채가구역에서 1차거사팀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기하고 있었고
러시아병에의해 발각되었고 안 의사도 밤을 새워서 아침 일찍 나가죠.
언제 이토의 일정이 바뀔지 모르니까..!
드디어 이토를 태운 기차가 도착함.
일본과 러시아의 삼엄한 경비를 예상한 안중근 의외로 러시아의 경비 제안을 거절한 일본 측.
일본다운 보여주기식 쇼.
일본에겐 중대한 실수였지만 천우신조의 기회죠.
러시아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토가 정범들과 함께 내린 순간
빠르게 뛰쳐나가 세발의 총알을 발사한 안중근
하얼빈 역에가면 이렇게.. 표시가 되어있다고해요.
처음부터 안중근은 도주할 생각이 없었나?
도주는 안중근의 뜻이 아닙니다. 도망가는 것은 의미가 없음.
안중근의 진짜 싸움은 저격후부터임 전세계에 이토의 죄악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죠.
보통은 암살자를 현장 사살하기 마련인데 그런데 왜 안중근은 생포했을까요?
코레아우라 라고 외치고 잡혔다고..하네요.
워낙 각국의 기자들도 많았고 사진사도 많기 때문에 그자리에서 바로 쏠순 없었을 것.
이 모든 것이 안중근의 게획이었던 것.!!
실제 러시아의 한 영화사가 공개한 안중근의 의거 영상
엄청난 특종을 잡은 기자.
그러나 아쉽게도 거사순간의 장면이 없다고해요..ㅠㅠ
사라진 거사 장면을 찾는 것도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에요.
전 세계에 일제의 악행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그러나 안중근의 진짜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토의 사망은 국제적 사건이죠. 최악의 경우 전쟁이 일어날수도 있어요.
러시아에 안중근의 신변을 넘겨줄 것을 요청한 일본. 안중근은 물론 재판권까지 넘긴 러시아.
안중근의 재판 장소를 놓고 치밀하게 계산한 일본.
의거후 도망가지 않은 건 다음 계획을 위해서 였음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상을 폭로하는 것이 목적임.
일본은 공정한 재판을 하는 척하면서 안중근을 꼭 사형시켜 반일 세력을 억누르려 함.
그래서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 안중근의 재판을 하얼빈이 아닌
치외법권은 외국인이 해당 국가의 국내법 적용을 면제받을수 있는 권리에요.
즉 뤼순 지방법원에서는 마음대로 재판 조종이 가능함.
일본이 뤼순을 선택한 계기가 된 사건이 있는데 스티븐스 저격사건이에요.
"이토가 통치해서 한국이 발전했다' 라며 망언을 일삼은 스티븐슨
스티븐스 방문 소식을 들은 샌프란시스코 미국동포들
샌프란시스코 지방법원에서 진행된 두 의사의 재판
장인환과 전명운인데 미국 본토에서 미국인을 살해해 두사람을 변호한 관선 변호사들
그런 스티븐스를 응징하면 한국의 독립이 달성될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것이라는 변호사들..
장인환 정명훈 의사에 애국적 환상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
저격에 성공한 장인환은 징역 25년
이 재판이 선례가 되면 안 의사는 사형이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하얼빈이 아닌 일본의 치외법권 지역인 뤼순을 선택함. 문명국따라하기를 시작함
마음은 굴뚝같았겟지만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안중근 하얼빈의거
춥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고문은 없었떤 수감생활
안중근을 단순한 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전략
심지어 안중근을 폄하하는 엽서까지 발행함.
그런데 엽사가 발행되고 나서 의도와 달리 영웅이 되었죠.
본의아니게 안중근 영웅 만들기에 이바지한 일본.
꺼져가는 항일의 불씨를 다시 일깨운 안중근 엽서.
인산인해를 이뤘던 첫 공판정 그러나 안중근이 거침없이 일본을 비판하자
방청객을 퇴장시키고 비공개 재판으로 전환한 일본
그러니까 안의사가 화가 나서
안중근을 회유하라!
이토를 오해했다고하면 감형해주겠다고 제안을 함
" 사면을 해주겠으니 이토 공을 오해했다고만 하시오"
"하얼빈에서 이토를 포살하려 작심했을때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 나는 목숨 같은거 생각하지 않으니 유혹하려 들지 마시오."
" 외국에서 당신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고 있으며 당신 조국인 한국인들조차 이토 공을 죽인 당신을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 나의 행동은 의를 위함이지 사적 명예를 탐해 나온 것이 아니오."
"우리 동포들은 누구하나 나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오."
" 서방 신문이 그랬다면 우리 동양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 때문이었을 것이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소."
한치의 망설임없는 완강한 대답. 결국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일본.
일본이 별 공작을 다 벌입니다.
한국인들의 항일 의지를 꺾으려는 일본의 의도.
사형이 가능토록 국제법을 왜곡, 변형시키고
항소해야 후일 도모도 가능할텐데 사실상 항소를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예상
항소대신 아직 못다 한 꿈을 글로써 남기고자 결심.
항소포기후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저술
또 하나 동양 평화를 위한 책, 동양평화론을 집필.
책을 쓰기 위해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형 집행을 늦춰줄 것을 요구했지만 빨리 안중근을 사형시켜 상황을 종료하려 한 일본
항소를 포기하고 책으로 자신의 뜻을 남긴 안중근
항소를 포기한 또 다른 이유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요.
사형을 선고받은 후 두 동생을 만난 안중근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편지와 수의를 보낸 어머니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감히 헤아릴수 없는 조마리아 여사의 전언
아들만큼이나 위대한 어머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는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안중근 의사를 지켜본 일본인들 중 특히 뤼순감옥 간수
치바토시치는 안중근을 지켜보며 깨달은 진실이 이토 공이 모두를 속였고
우리도 모르는 새 죄를 지었구나.
" 동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두 나라 사이에 우호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 다시 태어나 반갑게 만나기로 하세"
" 앞으로 선한 일본 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진실을 알고 마음 아파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죠.
그게 안의사의 뜻이기도 해요.
이토를 비롯한 일본 지배층이 문제라고 일본 국민이 나쁜게 아니다.
치바의 부탁을 받고 써준 안중근의 유목
지금도 치바도시치의 후손들이 안중근 의사를 기리고 있다고
치바 도시치의 뜻을 이어받아 매년 이어지고 있는 일본 대림사의 추모 행사
죽기 직전 안중근의 위패를 모실것을 부탁한 치바.
안중근 엽서를 품고 다닌 일본의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
일본 사람들도 이렇게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데 과연 우리는 그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간..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모든것을 버리고 독립투쟁에 헌신
당당히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대한민국 역사의 빛이 된 영웅, 안중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왜 안중근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을까?
영웅이 된 안중근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항일세력이 더 커질까 우려했던게 아닐까?
안중근의 무덤이 성지가 될것을 우려한 것. 지금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유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을 여러번 진행했지만 거듭 실패함.
지금도 뤼순 감옥터는 아직 존재해요.
철저히 안중근에 대한 기록을 은폐한 일본
해방후 효창공원에 모셔진 독립유공자들의 유해
그리고 그 옆자리에 유일하게 묘비가 없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올해가 안중근 탄생 140주년이자 3.1운동 100주년
한국 근현대사 인물 중 남과 북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에요. 그러나 여전히 들어주지 못한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
유해를 찾기 위해 남과 북이 계속 노력중이라고하네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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