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과 3.1운동 106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기억해야 할 선조들의 희생.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상하이의 특별한 장소에 방문.
독립을 염원하는 국내 운동도 활발했지만,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도 펼쳐진 독립운동.
광복을 위해 먼 나라에서도 힘썼던 국민들.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자리 잡았던 독립운동의 요충지.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
아쉽게도 독립에 다다르지 못했죠.
독립운동가 신채오는 독립을 쟁취할 실질적이고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정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확산됩니다.
국내에 있는 한성정부의 경우 적극적인 활동르 펼치기에는 위험했죠.
일본의 탄압이 용이한 위치이기도 해서 상항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게 됩니다.
아편전쟁 이후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된 중국,
화양별거라해서 중국과 서양인을 따로 주거하게 하는 정책입니다.
영국과 일본등 여러 국가가 함께 관리를 합니다.
각국의 법에 따라 조계지를 운영, 조계지에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한 독립운동가들.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프랑스 조계지를 선택합니다.
이후 프랑스 조계지 내에서 위치를 옮겨가며 독립을 도모하고 이후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역할까지 합니다.
상하이에서 만나는 독립운동의 역사.
독립 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상하이에서 가장 먼저 가볼 곳은?!
상하이에 온 한국인이 꼭 방문해야 하는 곳! 루쉰 공원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지?
평화롭게 휴식을 즐기는 상하이 시민들의 쉼터로 1896년 오락장으로 조성된 공간입니다.
영국 원예가 설계로 서양식 정원 양식이 특징입니다.
중국 문학가인 루쉰의 이름을 딴 공원으로
동상 뒤편에 루쉰의 묘가 자리해 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과 일본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인파.
그런데 오전 11시 50분,
폭탄이 터지며 아수라장이 된 공원, 단상 위에 떨어진 폭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
총 2명의 수뇌부가 사망합니다.
여러 전쟁 책임자들에게 중상을 입힌 거사죠.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주인공은
바로 독립운동가 윤봉길.
당시 이곳의 이름은 훙커우 공원 이었는데요.
상하이시 훙커우구에 위치해 지어진 이름으로,
이 곳이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광장입니다.
목숨을 걸고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
광장을 지나 공원 안쪽으로 이동하면, 루쉰 공원 내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고, 표지판도 한글로 되어 있어요.
1998년에 세워진, 의거 현장 기념비입니다.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을 했고,
1931년 상하이로 넘어와 생활하며 거사의 기회를 기다렷던 윤봉길.
마침내 다가온 기회,
뱀범 김구와의 만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임시정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도 만주로 이동합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지원도 중단되고, 사면초가에 빠진 독립운동가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하고자 한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합니다.
문제는 곧 죽을 젊은이들을 모집해야 하잖아요?
스스로 찾아온 청년단원들,
제 1호 단원은 이봉창 의사.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했죠.
약 4개월 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이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
당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행사에는 일본인만 참석이 가능한데,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비싼 양복과 회중시계를 구입합니다.
김구의 시계를 발견한 윤봉길.
거사를 위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의거 당시의 상황을 전시해 둔, 윤봉길 기념관.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물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순국한 윤봉길 의사.
중국으로 망명할 때 태어나지 않았던 둘째 아들,
두 아들을 둔 20대 청년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선택.
윤봉길 의사 하면 떠오르는 도시락 폭탄이 있죠.
그런데 사용되지 못했다고 해요. 당시 윤봉길 의사가 소지했던,
두 가지 폭탄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사일 당일 일본인으로 위장해 행사에 참석했는데,
경찰들의 의심을 피해 무사히 공원 내부로 진입했고, 군중 속에서 기회를 엿보다 일본 국가 합장이 끝나갈 때쯤,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형 폭탄을 단상에 투척했습니다.
의거에 성공한 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는데,
수통형 폭탄에 끈이 있어 던지기 쉽다고 판단했다고 해요.
도시락 폭탄이 아닌 수통형 폭탄으로 이뤄낸 의거.
폭탄 모형 옆 전시된 나무 형틀과 사진.
체포 후 폭행과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1932년 5월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후 일본 오사카 형무소로 이감된 윤봉길 의사.
1932년 12월 19일 순국하게 됩니다.
광복이후 1946년 3월 유해를 발굴했고,
1946년 6월 송환될 때까지 14년간 수없이 짓밟혔을 유해.
그 자리에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윤봉길 의사 추모관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윤봉길 의사.
우리나라 분들도 많이 오는데, 중국 분들도 많이 온다고 하네요.
홍커우 공원 의거 전 당시 독립운동은 침체에 빠졌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세계에 알려진 항일 의지.
국내외 독립운동의 활기를 불러일으킨 의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죠.
이곳은 임시정부 주요 인물들이 거주한 곳으로 이곳 2층에서 백범일지를 지필했다고 합니다.
김구 가족이 살던 영경방 10호.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해 있고, 석판으로만 찾아볼 수 있는 흔적.
아쉽게도 10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 영경방.
사실 이곳은 김구 선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슬픈순간을 모두 맞이한 곳인데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 김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영경방 10호.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는
1924년 계단에서 낙상 사고를 입은 후 갈비뼈가 부러져 늑막염이 발생했는데,
급히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폐 전문 병원은 단 한 곳뿐.
그런데 그곳은 하필 일본의 관할하는 지역입니다.
아내만 병원으로 보내고 따라가지 못한 김구 선생.
김구 선생 대신 최준례 여사를 간호했고, 그런데 늑막염 증세가 더욱 악화된,
고개를 저어 거절한 최준례 여사.
영경방에서 불과 10km 떨어진 병원, 죽음을 앞둔 아내에게조차 갈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
결국 아내의 임종을 보지 못한,
이후 어머니와 아들이 국내로 떠난 뒤, 거처를 옮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
그 다음 목적지는 독립운동의 힘겨움을 느낄 수 있었던 영경방 10호.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한 임시정부,
김구선생과 일부 임정 요인들은 자싱으로 피난을 갑니다.
자싱에서 따라가볼 김구 선생의 발자취.
김구선생이 즐겨먹던 음식을 팔던 가게입니다.
어떤 역사를 가진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
김구 선생이 즐겨 먹었던 메뉴인 쭝쯔.
삼각형 모양 찹쌀밥에 다양한 토핑을 넣어 입에 싼 뒤, 푹 쪄서 먹는 삼각김밥 st 찹쌀밥.
김구 선생이 일본 경찰에 쫓기며, 피난 생활을 하던 당시,
휴대가 간편하여 자주 드셨던 음식인 쭝쯔.
주문 즉시 찜기에서 꺼내줍니다.
가격은 한개에 3000원.
발효두부를 고기에 섞어 찹쌀밥 안에 넣어 만든 메뉴인 발효두부 & 고기쭝쯔.
생김새는 약밥과 비슷한데, 일단 밥이 진짜 쫀득하고, 안에는 양념된 고기 토핑이 들어있어요.
다양한토핑으로 즐기는 쭝쯔.
발효두부 맛은 잘 안나고, 고기와 찹쌀에 잘 어우러져 호불호 없는 거 같은 맛.
우리나라 약밥과 같은 쫀득한 식감의 쭝쯔.
시그니처 쭝쯔는 2000원.
다른 맛의 쭝쯔들보다 큼지막한고기가.
큼지막한 고기덕에 식감이 좋아 더 맛있다고 하네요.
지금은 종이 포장에 담겨 나오지만, 과거에는 잎에 싼 채로 들고 다녔던 쭝쯔.
모양이 삼각김밥같아서, 빠르게 이동하며 먹기 용이했던 쭝쯔.
쭝쯔를 먹고 다음으로 가볼 곳은?!
현상금 200억 원이 걸린 친구가 산다면 신고하지 않으실 수 있나요?
일본 경찰은 의거를 지시한 김구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재 가치로 한화 200억 원의 현상금을 거는데, 심지어 김구 선생 체포를 위해, 한국인 밀정들까지 김구 선생을 찾는 데 혈안이 됩니다.
혼란 속에서도 김구 선생을 지켜준 중국인 추푸청 일가.
당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중국.
항일 운동가로 활동했던 추푸청, 대한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
심지어 머물 집까지 제공해 줬습니다.
자싱의 김구 피난처로 1932년부터 약 2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내부 입장해보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의 스토리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의 피난경로.
김구 선생의 상하이 탈출을 도운 사람은 미국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
일본 경찰들은 김구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되어 있는데,
피치 목사 부부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의 저택에 숨겨준 뒤,
피치 목사 아내와 부부로 위장 후, 피치가 운전하는 차로 상하이를 탈출합니다.
임시정부가 있는 항저우까지 가기엔 위험하니까 대신 자싱으로 이동을 합니다.
홍커우 의거에 감동받은 중국 국민당 인사들,
당시 자싱 지역 국민당 간부가 추푸청이었고, 수장 장제스가 명령을 내립니다.
김구 일행을보호하라.
추푸청은 아들이 운영하던 공장에 김구 선생을 피신시킵니다.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양아들 천퉁성의 가옥에 은신처를 마련합니다.
이곳에 약 2년간 은신하게 된 김구 선생.
자싱에서 이어진 피난 여정, 장진구, 장진이란 가명을 사용합니다.
광둥 상인 행세를 하며 피신했고, 그런데 어느 날,
1933년 여름 김구 선생은 외출을 하다, 광둥인이 아닌 걸 들켜 붙잡혔고,
천퉁성의 보증으로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싱까지 일본 경찰이 쫓아옵니다.
추푸청에게 정말 감사한 게,
일가족 모두를 동원해 김구 선생을 지켜준 추푸청.
매우 위험 부담이 큰 일인데, 백범일지에 김구 선생이 남긴 말을 보면,
독립이 된다면 이들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은 물론 우리 동포가 감사해야 할 것이다.
활동사진을 못 찍어 기록하여 후세에 전달하고자 이 글을 쓴다.
후세가 기억해야 할 고마운 은인들.
1996년 대한민국은 이런 공로를 인정,
추푸청에게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합니다.
수많은 도움을 준 소중한 인연 추푸청 일가.
거주지 관람 공간으로 이동을 합니다.
입구에는 응접실과 중정이 있어요.
중정 뒤쪽에 위치한, 김구 선생 응접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김구 선생의 방이 있어요.
당시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깥 동정을 찾을 수 있는 창문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땐 매우 작은 창문이지만, 안에서는 넓게 감시가 가능합니다.
매 순간 마음 졸이며 내다봤을 창문 밖 풍경.
창문 외 이 방의 또 특이한 점은?!
바로 비밀통로입니다.
사다리를 내린 뒤 1층으로 내려가 빠르게 피신, 바로 집 뒤에 호숫가가!!
집이 호수와 맞닿아 있어 배를 통해 몸을 숨긴 김구 선생.
창문을 통해 밀정의 낌새가 느껴졌을 땐,
배 위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합니다.
호숫가 이곳저것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야할 때는 사인을 맞춰놔요.
빨간색 빨랫감은 안전, 검정색 빨랫감은 위험,
위험 신호가 계속된 날엔 정처 업시 강 위를 떠돌기도 합니다.
항저우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이 비밀리에 만나러 왔을 때도 육지는 위험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배 위에서 국무회의를 했다고 해요.
경치를 즐길 새 없이 마음 졸이며 보냈던 시간.
자싱에서 생활하던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
1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피난 생활.
험난한 여정에도 놓지 않은 독립을 향한 의지.
드디어 찾아온 대한민국의 독립.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 다시 일어선 우리 민족.
3.1운동 106주년 대한민국 독립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시간.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1919년 3월 1일 뜨거웠던 그날을 영원히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출처: 톡파원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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