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티비보기

아궁이 216회 - 노무현-문재인

by 로토루아8 2017. 6. 3.
반응형

삶과 죽을 함께한 화랑 사다함과 무관랑을 떠올리게한다고해요.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친구로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

두분의 관계는 동지애에 더 가깝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애증의 관계.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우정을 나눈 노무현-문재인.

문재인-노무현은 처음 어떻게 만낫나?

1981년 공안당국이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 회사원등을 불법 체포, 감금 후 고문해 기소한 사건인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서 나선 전 노무현대통령은 같이 일할 인권변호사를 찾았으나 독재 시절이라 나서는 이가 없었다고해요.

시국사건을 맡는 순간 세무사찰로 탄압하던 시절이어서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인권변호사의 길.

하지만 그때 문재인대통령이 전노무현 대통령을 찾아왓다고해요.

하지만 사법연수원 이후 검사 발령이 나면서 동업이 무산됌.

두사람의 첫 만남은 어땟는지??

2시간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눈 두사람. 

전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았다고.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느껴 바로 의기투합한 두사람.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국에는 관심이 없었던 변호사 노무현. 그때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일에만 집중했다고해요.

1981년도에 

영화 변호인에서 임시완이 연기한 실존인물 송병곤 학생을 만난 노무현 변호사.

고문으로 극심한 두려움에 떨던 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평소에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사무실에 왔지만, 피해자 면회 후 평소와는 다른분위기였다고해요.

책상에 엎드려 있엇고 독재의 탄압과 폭력에 분노를 느끼고 인권 운도으이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합니다.

시국을 걱정하던 노 변호사와 서울에서 만났는데, 당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상류층으로 인식돼 격식 차리고 목에 힘주고 있을 것 같은 직업 변호사. 하지만 유인태가 본 변호사 노무현은 정반대였다고해요 욕도잘하고 거칠으셨다고...ㅎㅎ

180도 다른 모습이라고해요. 노무현은 활화산처럼 격정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지만 문재인은 거대한 빙산같은 조용하고 듬직한 성격. 말수는 적었지만 속으로는 강인한 성품인. 노무현은 행동가 문재인은 사색가.

상반된스타일 그러나 심리적 궁합은 찰떡궁합.

두 사람 다 꼼꼼하게 일하는 스타일.

일하다가도 직원들과 수다 떨던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인권변호사로서의 활약상은?

군부독재의 탄압에 의해 자의적으로 일어났던 70년대 시민운동

80년대부터는 시민운동이 조직화되고 이념을 담게 됌.

1980년에 일부 서울대 학생들을 반국가단체로 몰

아 고문했던 사건인 무림사건,  1981년 신군부가 학생운동단체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인 학림사건, 

시국사건만 전담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일반사건 착수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금액. 경제 사정에 따라서는 무료변론을 해주기도 함.

이후 노무현 변호사가 정치계로 떠난 후 직원들 보너스 400%에 격주로 주 5일제 하자고 문재인변호사가 그랬다고해요.

80년대는 보너스도 없고 토요일에도 학교에 가던 시대였었다고해요.

당시 다른 변호사 부인들은 직접 사무실 수입을 챙겨갓지만, 사무실 수입에 관심조차 없었다고해요. 두분다.

어려운 시절에도 적은 돈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셨엇다고하네요.

이후 시.청각 장애인이 모여 구두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하지만 홍보가 잘 안 되자 서울역 광장에까지 나가 팔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판매를 권유. 5년전에 그때 국회에서 팔았을때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도 그때 샀던거같다고해요.

다른변호사분들은 여러복의 양복을 가지고 있는데, 문 대통령은 한벌로 봄.가을을 한벌로. 겨울에 두꺼운 양복한벌! 7년씩 한벌을 입었다고해요.

한번사면 7년을 입고 구두 닦는데 400원 지불하는 것도 아꼇다고해요.

82년도 변호사를 처음 개업하면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4~5만원 주고 구매해서 2003년 청와대 민정수석이 될 때까지 20년간 사용한 거라고하네요.

1987년 김대중-김영삼이 분열하면서 12.12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 대통령에 당선.

노태우 정부에 비판적이던 재야인사 영입이 승부수였는데, 당시 노무현 변호사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에 입문.

1987년 6.29 선언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평가 받은 변호사 노무현.

하지만 대우조선 사건으로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고해요.

부산 민주화 운동권에서는 정계 진출에 긍정적 반응이었던것.

당시 친구였던 문재인 변호사도 찬성.

노 대통령이 정계에 진출한 후 변호사 문재인의 행보는?

1989년 동의대 사건은 부정입학에 항의하며 시위하던 학생들과 진압하던 경찰들 사이에 무력충돌이 빚어져 경찰관이 사망한 사건.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이 생기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경찰 7명이 사망했고 당시 구속인 수만 77명.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학생들 변호사를 맡았었고,

진주 경상대빨치산 사건1991년에 경상대 학생들이 빨치산 후예를 자처하며 무장투쟁을 벌인 것으로 조작된 사건도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다고해요.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던 두 교수를 11년간 변론.

노동자들을 상대로하다보니 수입이 별로없는...;;

변호사들 모두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약한 덕분에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해요.

1987년 36%의 득표율로 당선된 노태우. 하지만 민주화 열기로 통치에 난항을 겪었다고해요 당시 김대중을 제외한 3당 합당으로 거대 야당이 탄생함.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 지역은 종북세력으로 몰았을때 김대중과 손을 잡은 노무현에게는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선거였음.

1995년 부산시장 낙선. 1996년 15대 총선에서 이명박과 경쟁해 낙선.

연달아 세번 낙선하니깐 정치 인생 끝날 위기에 몰림.

그리고 식당을 개업했다고해요.

당장 필요없어도 곧 쓰일 때가 온다는 뜻의 이름이라고해요.

처음 석달간은 손님이 많이 왓지만 망했다고해요.ㅎㅎ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며 종로구를 공천 받아 19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당선.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공천을 거절하고 부산 경남지역으로 출마할 것을 선언합니다.

지역감정의 골이 깊었던 시절이라. 다시 낙선됌.

정치인답지 않은 자세에 감동한 국민들.

대선 출마를 하게된계기는?

15대 대선부터 가슴 속에 품고있었던 대통령의 꿈.

당시 여당이었던 이회창 후보 진영에서 경선 결과에 불복하며 나온 이인제. 그 못브을 보며 대선의 꿈을 접었다가 2000년 접어들고 노사모 결성이후 대통령의지를 확고히했다고해요.

당시 언론 통제로 5.18에 관한 소식을 정확히 들을 수 없던 상황이었을때 그런 소식을듣고 내가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될거라고 했는데 그때는 흘려들었었다고 하네요.

이거야말로 노무현을 위한 경선방식이다 라고 생각했다고해요.

광주에서의 돌풍을 기점으로 경선에 승리한 노무현 후보.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설득하고 그래서 결국인 수인하셨다고해요.

당시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을 꺼리던 분위기가 있어 

김대중 정부시절에도 김성재 민정수석 역시 민정수석실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었다고해요.

그당시에도 역시 거절했던 문재인 변호사.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눈에 띄었던 문재인 변호사.

수석이 되고선 부인도 백화점에 못가게 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하셨다고해요.

졸업생 동기들도 만나주지도 않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기도했다고해요.

원칙에서 벗어남 없이 자기관리에 철저한 성격.

학벌. 집안을 내세운 언론의 공격도 나날이 심해지고 

ㅋㅋ이분은 대통령의 불신때문에 편했다고...

이가 10개나 빠질 때까지 참고 견뎠던 문재인 수석.

녹내장까지 걸리며 온몸이 종합병원과 다름 없었다고해요. 아픈 내색 하지 않고 묵묵히 업무수행을 했다고해요.

선거출마를 거절하자 혼자 호화로운 직책을 누린다며 비판이 쇄도.

민정수석 맡는 조건으로 정치는 절대 안 할테니 요구하지 말라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약속받아놨었던 그래서 민정수석 사퇴후 바로 네팔로 떠낫다고해요.

사퇴하고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고 네팔에 갓다고해요. 트래킹과 스킨스쿠버도 하고 자유를 방해받지 않기위해 휴대폰도 놓고갔는데. 호텔에서 영자신문으로 접하게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식을 듣고 급하게 귀국했다고해요.

부산변호사협회가서 변호사 등록하고 변호인단을 영입을했다고해요.

젋은 유권자들 중심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에 분노를 느낀 국민들. 탄핵 기각결정은 국민 정서를 고려한 헌재의 판결이라는 분석도 있음.

1987년 경남 거제 대우조선 노사분규 시위에서 노동자인 이석규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인 대우조선노조사건에서 당시 현장에서 시위한 노무현 변호사.

제3자 개입죄로 영장 청구받고 구속.

그때는 구속적부심사 제도가 있었는데, 구속된 피의자에 대하여 법원이 구속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심사하여 타당성이 없으면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

그때 심사를 할때 99명의 변호사가 동참해서 심사 적부 청구서도 넣고해서 부적하다고 석방을 해줬다고해요.

탄핵 재판 후 문재인 변호사를 다시 청와대로 부른 노 전 대통령.

시민사회수석은 시민사회와의 관계 개선, 갈등이 생겼을 시 봉합하는 역할.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로 시민사회와 틀어지게 됌.

시민사회와의 관계 재설정이 필요한 시점에 기용된 문재인 수석.

다시 민정수석과 정무특보를 거치게 돼 마지막에 비서실장으로.

비서실장이란 직위가 고통스러웠다고 소회를 밝혀 

레임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어렵던 시기 에 모든 어려움을 감안하고 비서실장자리를 수용.

업무처리능력이 탁월했다고해요.

박연차 게이트 당시 가족이 돈을 받았단 사실을 몰랐던 노 전 대통령. 

1월쯤 전해 듣게 된 친인척 비리 소식.

상을 치른 후 집에서 눈물터져 탈진할 정도로 심해 구급차를 불럿을 정도까지.

누군가는 힘들더라고 해야할일이어야하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비서실장의 임무를 충실히함.


<출처: MBN 아궁이>

반응형

댓글